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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림질을 하면서

다림질을 하면서

  • 기자명 추성칠(본사 객원논설위원)
  • 입력 2009.06.01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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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다린다. 막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아내가 바빠지자 다림질은 자연스럽게 내게로 왔다. 예전에 사내가 부엌에 가면 뭐 떨어진다고 금기시하던 일들 중의 하나가 다림질이었다. 지금은 내 일로 자리 잡았다. 일요일 저녁 여섯시 KBS 제1FM을 틀면 「세상의 모든 음악」의 시그널이 들린다. 일주일동안 구겨졌던 마음과 생각을 펴보려 함이다. 내 옷과 아이 교복을 모아 놓고 다림질을 시작한다. 아이 교복이 먼저다. 치마와 블라우스 두벌이 전부지만 말이다. 구겨진 블라우스를 보면 고단한 고3의 일상이 떠오른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공부에만 점철된 아이의 삶은 어떤 것일까? 여러 과목의 책을 들고 간 소매에는 필기구의 흔적이 남아있고 팔꿈치 쪽을 늘 책상에 대고 있어 자국이 남았다. 선생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으려 허리를 언제나 곧게 펴고 있었을 것이다. 노트에 필기하면서, 졸음에 겨워 블라우스 소매에 펜을 그었으리라. 지저분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건 자랑스러운 표식일 수 있다. 물뿌리개로 물을 뿌리고 다시 다리미를 눌러본다. 여학생이라 그런지 칼라는 늘 희고 깨끗하다. 뒤는 나보다 남이 많이 보는 곳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칼라는 자존심일 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켜야 할 것이 자존심이므로. 학교를 오가는 젊은 느티나무들 사이로 아이의 흰 칼라가 보인다. 다림질에서 어려운 곳이 단추가 있는 부분이다. 단추사이는 구김도 쉽고 잘 펴지지도 않는다. 천양희 시인처럼 단추를 채워보니 단추가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 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아이는 알고 있을까. 삶에서 첫 단추가 잘못 채워져 고난을 겪는 사람들을 본다. 첫 단추를 잘못 꿰게 되면 다음은 당연히 어려워진다. 되돌림이란 없는 게 삶이므로. 공부도 시기를 놓치면 힘들어지듯이. 치마를 편다. 앞쪽으로 두 줄의 선이 있다. 접선은 주름으로 돼 있다. 주름 안쪽은 색깔도 바래지 않았다. 살아감과 비교한다면 주름은 삶의 어두운 면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일본의 작가 다치바나 다카시의 글이 떠오른다. 성인이 되면 어두운 면을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술, 마약, 폭력 등 살아가면서 밝고 아름다운 부분은 쉽게 잊혀지지만 어둡고 괴로운 면은 잘 지워지지 않고 오래도록 남는다. 그런 것들이 정상적인 삶에 걸림돌이 된다면 더욱 안 되기 때문이다. 어두운 면도 극복하기 나름이다. 현명한 사람들은 여기에서 소중한 경험을 얻는다. 유치원 때 아이는 뇌수막염으로 입원했었다. 아이는 종일 눕지도 못했다. 척수를 빼내 허리를 굽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간호를 하면서 아이를 안은 채 나는 잠이 들었다. “아빠 괜찮아 내가 혼자앉아도 돼” 아픈 아이가 오히려 잠든 나에게 힘을 주는 거였다. 녀석은 주름을 잘 이겨낼 것이라고 믿는다. 아이들의 삶은 우리 세대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선택의 폭이 좁고 변화가 빠르며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류가 과학기술의 발달로 더 큰 행복을 가져오려는 염원과는 반대방향이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정신은 피폐해지고 삶은 고단하다. 가치관도 예전과 비교할 수 없다. 선악의 판단 자체가 틀린 답이 되는 시대에 와 있다. 보편적인 삶이, 가치가, 생활이 사라져버린 현대사회에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단 말인가. 육체의 건강뿐이 아니라 정신의 건강이 염려되는 시기다. 다림질이 끝나고 교복을 옷걸이에 걸으면서 속삭인다. 올바르고 의연하게 자라거라. 설령 잘못된 일이 있더라도 용서하는 마음으로 구김살을 펴거라. 그래야 깨닫는다. 용서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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