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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책

기억의 책

  • 기자명 이상국(본사 객원논설위원)
  • 입력 2008.08.26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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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태국에서 3달 동안 태국어를 배웠다. 그리고 당초 계획이 여의치 않아 귀국했고 태국어를 사용할 일 없어 미련 없이 잊었다. 그런데 태국말을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외사촌이 비닐하우스 작물을 재배하는 관계로 태국인을 3명이나 고용하고 있는 거다. “사왓디 클랍(안녕하세요).” “안뇽하세요.” 첫 대면이 시작 되었다. 이 친구들 웬 태국말 하는 조선 놈이 시골구석에 있을까하는 눈치다. 하지만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다. 말이, 태국 말이 나와 주지를 않는다. 도통 써먹지 않았으니 까먹을 수밖에. 버릴까하다 접어둔 태국어 교본을 읽는다. 태국에서 수십 차례 반복학습으로 이력이 난거라 쉽게 원대복귀 될 거라고 초반은 대강대강 훌훌 넘기고 후반부를 읽는데 아니올시다. 이게 도대체 뭐냐. 작년에 달달달 외다 시피 읽고, 읽어서, 읽으면, 잠꼬대 할 정도로 기를 쓰며 배우던 거 맞나하는 생각이 들고, 늙어 기억이 쇠한 건가 겁도난다. 다시 만났다. “안녕.”에서 “너 언제 한국에 왔니?” 온지 8개월이고 당시 겨울이라 추웠고 눈을 생전 처음 보았다고 한다. 이 정도면 꽤 진보한 거다. 그러나 또 한계에 부딪는다. 에라 이 애들과 태국말 지껄인다 해서 내 인생, 얘네들 일상에 소득 될 일 없고 뙤약볕에 일하는 놈들 말시켜 작업 능률만 떨어뜨릴 것 같아 접기로 했다. 또 다시 만났다. 마지못해 몇 마디만하고 떠날려니 이놈들이 어찌나 반색을 하는지, 제 할아비를 만나도 이보다는 못할 거다. 아차. 수만리 타국 ― 한국에서 자기 말할 줄 아는 이 한국인이 그들에겐 구세주로 보일지도 모른다. 돌아와 밤 새워 책을 읽는다. 태국어 교본이래야 태국말은 발음기호로, 뜻은 영어로 표기한 얄팍한 공책 비슷한 거라 온당한 책이랄 것도 없다. 기호들의 나열일 뿐. 처음부터 꼼꼼히 읽는다. … 두 디디(잘 보아라) 황 디디(잘 들어라) 킷 디디(깊이 생각하라) 풋 당당(크게 말하라). … 40도가 웃도는 폭염. 이글이글 타는 태양이 있고, 새까맣게 썩은 짜오뿌라야 강물위에 100여명을 태운 배가 쏜살 같이 달리며, 아름드리 자주색 빠나나 꽃이 피고, 출근길 도회 한 복판 길거리에 스님 한 분 부여잡고 간절히 기도하는 미니스커트의 아가씨… …“쿤 빠이 어라이 클랍(어디 가시게요).” “폼 ‘빠이 디에우(여행 갈란다).”… … 오토바이로 달리는 수코타이, 자전거 여행의 아유타야, 남편이 경찰이라는 젊은 여인과 찍은 한 장의 사진… 태국어 룸메이트 ― 러시아, 일본, 프랑스, 영국 여인들… 한바탕 아우성치는 소낙비 지나가자 지평선에 떠오른 거대한 무지개… … 주말이면 어김없이 모이는 인터넷 카페 ― 태사랑 모임. 일주일 내내 태국인들하고만 떠들고 듣고 말하고, 태국 밥만 먹고, 태국 물만 마시고…. 조국 동포들 만나 밤새워 술 마신다. “수신제가치국(修身齊家治國)이란 말이 있지. 그거 맞는 말일까. 수신을 하면 제가가 될까?” “아암 되고말고.”… 어느 틈에 방콕 도심 속 한국말이 취하기 시작 한다. … 19세기와 21세기가 혼재하는 방콕. 외국인 2, 300명이 사는 아파트에 ‘뉴스 페이퍼’가 뭔지 모르는 녀석이 경비를 서는가 하면, 버스 차장, 초등학교 어린이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시내버스가 개문 발차하며, 삼륜차, 오토바이가 차선을 마구잡이로 넘나들고, 지하철 지상철이 미끄러지듯 달리며, 장거리 여행버스는 에어컨을 최대한으로 가동해 손님 바짝 얼쿼 죽일 작정인지. 춥다면 에어컨을 끄는 게 아니라 담요를 덮어주는 이 친절은 비행기 스튜어디스에게서 배운 것인지 마음껏 사치를 부려보자는 심사인지. 정전이 다반사로 발생하는 아파트, 그러나 더 몰, 빅 씨(대형매점 또는 백화점), 아웃렛이 첨단을 자랑하는 방콕은 꿈틀거리는 공룡의 도시. 시작도 끝도 없는 이야기. 98쪽 사이사이 스며든 열사의 나라 밤하늘, 달, 별,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 그리고 기억의 파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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