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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기념관의 ‘히젠토’는 왜 사라졌나!

명성황후기념관의 ‘히젠토’는 왜 사라졌나!

  • 기자명 이장호 기자
  • 입력 2024.03.19 09:38
  • 수정 2024.03.20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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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부터 20년 넘게 전시된 명성황후 살해 칼 복제품

‘여주시민과의 대화’에서 한 시민, “칼 전시 부적절 지적”

향토사학계 “일본의 잘못된 역사의식 바로잡는 게 먼저”

당시 복제품 업무담당자 “어이없는 일에 분통이 터진다”

한국에 널리 알려진 후 ‘구시다 신사’는 ‘히젠토’ 비공개

명성황후기념관
명성황후기념관

 

여주시 능현동 명성황후 생가 유적지 일원에 있는 여주시가 설립한 공립박물관인 명성황후기념관(경기-공립21-2017-07호, 사진 왼쪽)에서 지난 2001년부터 전시해 오던 히젠토(肥前刀) 복제유물이 최근 전시관에서 사라져 논란이다.

명성황후 시해에 사용된 히젠토 복제품 전시 당시의 사진
명성황후 시해에 사용된 히젠토 복제품 전시 당시의 사진

 

히젠토 봉납 대장과 사진으로 대신 전시하고 있다 @이장호 2024.03.17.
히젠토 봉납 대장과 사진으로 대신 전시하고 있다 @이장호 2024.03.17.

 

■ 히젠토(肥前刀)는 살상용 칼

히젠토(肥前刀)는 일본 히젠(규슈(九州) 지방의 서북쪽, 지금의 나가사키 현(長崎県)과 사가 현(佐賀県)을 합친 지역에서 만들어진 칼을 이르는 명칭이지만,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새벽 일본의 공권력 집단이 자행한 명성황후 살해사건인 을미사변 (乙未事變) 때 왕비의 침전에 들어간 3명의 자객 중 한 명인 ‘도 가츠아키(藤勝顯)’가 명성황후를 살해하는데 사용한 후 1908년 그가 직접 일본 후쿠오카 구시다 신사(櫛田神社)에 바친 칼을 이르는 말로 더 유명하다.

‘조선 왕비를 이 칼로 베었다’는 설명이 붙은 일본 구시다신사(櫛田神社)에 보관된 히젠토(肥前刀) 봉납 대장 (출처: KBS역사저널 그날 ‘영상한국사 074 을미사변 - 조선의 왕비, 사무라이의 칼에 목숨을 잃다’ 화면 갈무리)       https://youtu.be/s639DAIMvNM?si=JzJgGoMADuhVC0Fm
‘조선 왕비를 이 칼로 베었다’는 설명이 붙은 일본 구시다신사(櫛田神社)에 보관된 히젠토(肥前刀) 봉납 대장 (출처: KBS역사저널 그날 ‘영상한국사 074 을미사변 - 조선의 왕비, 사무라이의 칼에 목숨을 잃다’ 화면 갈무리) https://youtu.be/s639DAIMvNM?si=JzJgGoMADuhVC0Fm

 

명성황후 살해에 사용된 히젠토(肥前刀)는 16세기 에도시대(江戸時代)에 타다요시(忠吉)란 장인이 만든 살상용 칼로 길이 120㎝로 칼날만 90cm이며, 나무로 만든 칼집에는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一瞬電光刺老狐)’라고 새겨져 있다. 구시다 신사(櫛田神社)에서는 이 칼과 함께 ‘조선 왕비를 이 칼로 베었다’라고 적힌 문서를 보관 중이다.

■ 명성황후 생가 유적지 조성

지난 1995년 당시 여주군은 여주에서 태어난 명성태황후 민씨(정식 시호는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명성태황후(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齊徽烈穆明成太皇后), 이하 혼란을 피하기 위해 명성황후라고 함)의 생가 성역화 사업을 펼쳤다.

명성황후 생가 @2004
명성황후 생가 @2004

 

당시 여주군은 1687년 당시의 건물인 안채만 남아있던 생가의 사랑채 등은 1995년에 복원했고, 2000년에 준공된 명성황후기념관에는 고종황제 친필편액, 명성황후 친필 편지, 궁중 유품 등 110여점이 전시되었으며, 2002년에 준공된 문예관에서는 명성황후 애니메이션을 매일 4회씩 상영했다.

이후 2006년에 명성황후가 8살 때 여주에서 한양으로 올라간 후 왕비로 간택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인 감고당(感古堂 조선 제19대 숙종의 왕비인 인현왕후가 친정을 위해 지은 건물)이, 서울 종로구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있다가 1966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겨진 뒤 철거 위기에 놓이자 여주군이 2006년 명성황후 고향인 현재 위치로 원형을 이전했다.

명성황후기념관 @이장호 2003
명성황후기념관 @이장호 2003

 

또 생가 옆에 민가 5동을 건립하여 공방과 향토음식점, 농특산물판매장 등으로 활용하고, 민가 앞에는 광장을 조성하여 민속놀이 및 현장체험 공간으로 활용하면서, 명성황후 생가 일대 5만9601㎡ 부지에 명성황후 생가 유적지를 조성했다.

■ 살해 도구 복제유물 전시는 왜?

일본 구시다신사에 보관 중인 히젠토(출처: 문화재제자리찾기)
일본 구시다신사에 보관 중인 히젠토(출처: 문화재제자리찾기)

명성황후기념관에 전시관에서 히젠토(肥前刀) 복제유물을 전시하게 된 것은 지난 2001년경 당시 여주군 명성황후유적관리소 이성철 소장이 한 ‘문화유산 해설사’로부터 부산일보에 ‘명성황후를 살해한 칼이 발견됐다’는 기사가 실렸다는 말을 듣고 확인한 결과 일본 후쿠오카 구시다 신사(櫛田神社)에 있다는 내용과 히젠토(肥前刀)와 봉납대장의 사진에 대해 알게 됐다.

이성철 씨는 “당시 부산일보에 연락을 해 신문에서 보도한 사진으로 복제품을 제작해 명성황후기념관에 전시하고 싶다는 말을 했더니 흔쾌히 승낙해 여주군 예산으로 제작해 전시하게 됐다”며 “당시 기념관을 관람한 많은 사람들이 히젠토(肥前刀)를 보면서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탈하기 위해 저지른 만행에 대해 크게 분노했다”고 밝혔다.

이 씨는 “공직자로서 했던 일중에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명성황후의 고향인 여주에서 무슨 이유로든 히젠토(肥前刀)의 전시를 중단한 것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 분통이 터진다”고 말했다.

‘명성항후 시해 칼 일본 신사서 발견’ 기사가 실린 1994년 8월 22일자 부산일보(출처: 부산일보)
‘명성항후 시해 칼 일본 신사서 발견’ 기사가 실린 1994년 8월 22일자 부산일보(출처: 부산일보)

 

■ 히젠토(肥前刀) 환수 요구는 왜?

히젠토(肥前刀)가 국민적 관심을 끌게 된 것은 현 ‘문화재 제자리 찾기’ 대표인 혜문 스님이 2006년 문화재 환수운동을 하면서 자료를 조사하러 일본에 갔다가 이 칼의 존재를 알게 돼 구시다 신사에 들러 칼과 칼집, 봉납기록을 확인했다. 그리고 2010년 26일 안중근 의사 순국 100년을 맞아 ‘히젠토 환수위원회’가 출범하며, 구시다 신사의 히젠토 보관에 문제를 제기하고 국민적인 반환 촉구 운동을 펴면서부터다.

이후 여러 언론매체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탐사보도가 이어졌으며, 이후 구시다 신사에서는 이 칼을 공개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후 우리나라 독립운동 관련 단체와 시민단체, 심지어는 청소년들까지도 지속적으로 명성황후 살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진심어린 사죄, 구시다 신사에 보관 중인 히젠토(肥前刀)를 압수하여 한일 역사인식의 공유를 위하여 한국 측에 정중히 인도, 명성황후 살해 관련 자료 공개 등을 주장해 왔다.

명성황후 탄신 162주년 명성황후 숭모제 @이장호 2013
명성황후 탄신 162주년 명성황후 숭모제 @이장호 2013

 

■ 국회, 남양주시의회 결의문 결과

또 우리나라 국회에서는 지난 19대부터 시작하여 20대와 21대 국회에도 ‘명성황후 살해에 사용된 히젠도 처분 촉구 결의안’ 제출되어 있지만 단 한 번도 통과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2010년 4월 21일 고종과 명성황후 무덤이 있는 경기도 남양주 시의회는 본회의에서 “일본 정부는 히젠토를 파기하거나, 아니면 당시 사건의 현장이었던 한국으로 인도해야 한다”며 “범행 도구로 쓰였던 흉기이므로 일본 검찰이 압수해서 처분하는 것이 당연하고 명성황후 살해에 대한 참회의 일환으로 한국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일본 쿠시다 신사 소장 히젠토 처분 촉구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 히젠토(肥前刀)를 보는 입장 차이

일각에서는 “명성황후를 살해한 칼을 가져와서 끔찍한 역사를 떠오르게 하냐?”는 입장도 있다. 

이런 입장은 올해 여주시의 ‘시민과의 대화’에서 여주시 오학동의 한 주민은 “명성황후 생가가 노후화되어 부끄럽다. 시설보수가 필요하다. 명성황후가 태어나신 곳임이 부각되었으면 한다”며, 히젠토(肥前刀) 복제유물의 전시가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여주시는 이와 관련한 의견을 명성황후기념관을 위탁운영 중인 여주세종문화관광재단에 전했고, 전시품을 교체하면서 히젠토(肥前刀) 복제유물을 수장고로 옮겼다고 한다.

그러나 명성황후기념관의 히젠토(肥前刀) 복제유물 전시 중단이 알려진 후 지역 향토사학계에서는 “히젠토(肥前刀)를 보는 여러 입장이 있지만, 이 칼에 대한 국민적 환수 요구가 지속되고 있고 히젠토 환수는 일본의 침략주의적인 행동을 잊지 않기 위한 행동이다. 일본 정부가 아닌 민간단체가 사죄한다고 방문해 전달한 기념품은 전시하고 히젠토를 치운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 구시다 신사의 히젠토 공개 중단

히젠토 환수위원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은 “일본 구시다 신사가 히젠토(肥前刀)의 공개를 중단한 것은 명성황후 살해와 관련한 사실을 감추려는 의도가 있다”고 의심하고 있는 것이 비추어 볼 때, 명성황후의 고향에 세워진 기념관에서 히젠토 전시 중단은 여러 논란을 끊임없이 만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명성황후를 살해한 칼 ‘히젠도’를 보관하고 있는 일본 구시다 신사 박물관((櫛田歷史館)의 비공개를 알리는 안내문 (출처: BBS불교방송 BBS NEWS(https://news.bbsi.co.kr))
명성황후를 살해한 칼 ‘히젠도’를 보관하고 있는 일본 구시다 신사 박물관((櫛田歷史館)의 비공개를 알리는 안내문 (출처: BBS불교방송 BBS NEWS(https://news.bbsi.co.kr))

 

■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

명성황후에 대해서는 엇갈리는 평가가 존재한다.

부정적인 평가의 시작은 1895년 일본인 기쿠치 겐조(菊池謙讓 1870~1953)가 창간한 한성신보는 명성황후에 대한 비난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구마모토의 낭인인 기쿠치 겐조는 명성황후 살해 가담자 중 하나로 이후 조선에서 언론인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사 왜곡과 유린에 앞장선 인물로 꼽힌다.

그러나 명성황후를 직접 만난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은 저서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에서 그녀에 대해 ‘대화 내용에 흥미를 가지게 되면 눈부신 지성미로 얼굴이 빛나는 지식인이자 우아한 자태를 가진 귀부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 명성황후 추모 학술세미나

이런 가운데 사실을 바탕으로 규명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명성황후를 주제로 한 여러 학술대회가 열렸으며, 특히 지난 2015년 10월 7일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명성황후 시해 120주년 추모 학술세미나’가 당시 새누리당 여성의원 모임(대표 나경원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위원장)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의 주최로 열렸다.

명성황후 시해 120주년 추모 술세미나(국회도서관),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성황후 시해 120주년 추모 술세미나(국회도서관),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당시 행사를 주관한 새누리당 소속 나경원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은 “명성황후는 조선 역대 왕비 중에서 정치적 감각과 능력이 가장 뛰어난 왕비이며, 열강의 각축장 속에서 명석한 안목을 가지고 지혜를 발휘한 인물”이라며 “명성황후의 역사적 위상과 의미를 바로 잡고, 명성황후 시해의 진상을 규명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학술대회에서 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은 ‘명성황후의 역사적 위상’이라는 기조강연을 통해 “명성황후에 대한 연구 경향은 대체로 세 가지로, 첫째는 가부장적인 유교사관에서 여성으로서의 명성황후의 정치참여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견해이다. 둘째는 주로 일본 측 학계의 경향으로 철저한 반일주의자였던 명성황후에 대한 부정적 견해로서 이는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실을 합리화하기 위한 식민사관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셋째는 위와 같은 편견에 치우친 부정적 시각을 바로잡기 위한 긍정적 입장에서 명성황후의 업적을 평가해 보려는 시도로서 주로 대외 정책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를 진행해 온 것”이라며 “이제 일본당국은 명성황후 시해를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 진실된 역사반성 위에서 앞으로 한일간의 진정한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열어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2015년 10월 7일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열린 ‘명성황후 시해 120주년 추모 학술세미나’ 자료집 표지와 당시 새누리당 나경원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위원장 인사말
2015년 10월 7일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열린 ‘명성황후 시해 120주년 추모 학술세미나’ 자료집 표지와 당시 새누리당 나경원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위원장 인사말

 

한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을미사변 (乙未事變)에 대해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새벽 일본의 공권력 집단이 서울에서 자행한 조선왕후(명성황후) 살해사건이다. 러시아와 일전을 준비하던 일제는 조선의 대러시아 관계의 핵심에 고종의 왕후가 있다고 판단하고 제거를 계획했다. 갓 부임한 일본공사 미우라의 지휘 아래 서울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무력으로 삼고 일본공사관원, 영사경찰, 신문기자, 낭인배를 행동대로 삼아 경복궁을 기습하여 왕후를 참혹히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웠다. 사후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관련된 자들을 모두 무죄로 방면했으며, 아직까지도 사실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적고 있다. 

정리 이장호 기자

>>KBS역사저널 그날 ‘영상한국사 074 을미사변 - 조선의 왕비, 사무라이의 칼에 목숨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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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맨 2024-03-20 17:57:59
히젠토는 전시되어 만행의 팩트는 널리 공개되어이공개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왕비에대한 공과는 바로 잡아야합니다. 사치, 권력욕, 청군초치, 매관매직, 사욕등 망국의 단초를 초래한 점도 분명히 교육해야 합니다. 부끄러운 역사도 가르쳐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