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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르칸트의 그 여인은 ‘여주사람’일까?

사마르칸트의 그 여인은 ‘여주사람’일까?

  • 기자명 이장호 기자
  • 입력 2023.07.05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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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출신 독립운동가 조병하 선생 후손 찾기 이야기

독립운동가 조병하 선생과 잠시 가족의 인연 맺어

1965년까지 교류했지만 그 후로 소식 끊겨 아쉬움

KBS1-TV 『걸어서 세계 속으로』 제작진에게 "여주사람"이라고 말하는 현지 여성
KBS1-TV 『걸어서 세계 속으로』 제작진에게 "여주사람"이라고 말하는 현지 여성

 

지난 2012년 2012년 8월 18일. KBS1-TV의 장수 시사교양 프로그램인 <걸어서 세계 속으로>의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우즈베키스탄’의 한 장면에 경기 여주시에 사는 퇴직 교사 조성경 씨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프로그램 제작진이 사마르칸트 중앙시장에서 ‘탄두르’라 불리는 화덕에서 굽는 전통 빵인 ‘레표시카(Lepyoshka)에 글자를 새겨달라는 주문을 하던 중에 상인 여성의 입에서 튀어나온 우리말 때문이다.

 

걸어서 여행하는 프로그램이라는 제작진의 설명을 듣던 이 여성은 불쑥 “걸어서 어디 갔다 왔어요?”라고 말했고, 제작진이 “한국말 어떻게 아세요”하고 말하자, 돌아온 대답이 “나 여주사람이요. 할아버지 여주사람이요”였다.

조성경 씨가 조병하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조성경 씨가 조병하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조성경 씨는 이 상인이 할아버지인 여주출신 독립운동가 조병하 선생의 후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여주시청에 도움을 요청했다. 조 씨의 요청을 받은 여주시청 시민소통담당관 대외협력팀은 해외거주 여주출신 독립운동가 후손 찾기를 위해 사마르칸트와 자매결연을 맺은 경북 경주시에 협조를 요청했다.

여주시와 경주시는 지명에 고을 ‘주(州)’가 들어가는 도시들의 모임인 전국동주도시교류협의회에 함께하는 자치단체로 경주시에는 올해 5월 사마르칸트의 공무원이 파견될 예정이어서 그를 통해 사마르칸트 상인의 인적사항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지난 6월초 사마르칸트 정부에서 그 상인을 찾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녀의 이름은 Dustonova (Inoyatova) Norchuchuk (더스토노바 (이노야토바) 노추추크)라는 것을 알게 됐고 조병하 선생을 안다는 것이다.

영상통화 사진을 캡처한 그녀의 모습은 TV 프로그램이 방영된 지 10년이 넘었기에 변화가 있었지만, 얼굴 모습은 그녀가 분명했다.

그녀를 찾아냈다는 소식에 조성경 씨와 여주시청 공무원들은 그녀가 조병하 선생의 후손일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가득 찼다.

그러나 얼마 후 들려온 소식은 안타깝게도 그녀는 조병하 선생의 후손이 아니었다.

사마르칸트에서 조사된 내용에 따르면 그녀가 한 살 때인 1954년 화재로 집이 심하게 손상되어 사마르칸트에서 20km 떨어진 Charkhin(차힌)으로 이사했다. 그녀의 어머니 Zainab Karimova(자이나브 카리모바)는 화재로 중상을 입었고 아이를 돌볼 수 없어 자녀가 없는 한국 가정이 부모의 동의를 얻어 아기를 입양했다. 그러나 2개월 후 그녀의 어머니는 몸이 회복되어 아이를 다시 데려갔다. 그러나 두 가족의 관계는 1965년까지 지속됐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소식이 끊겨 조병하 선생 가족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의 조병하(趙柄夏) 선생 사진(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의 조병하(趙柄夏) 선생 사진(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조성경 씨에 따르면 국가보훈청 공훈전자사료관에 기록된 사망년도 1947년은 “할아버지와 소식이 끊긴 후 돌아가셨을 것으로 추정해 사망신고를 했기 때문”이라며, “큰할아버지는 옥고를 치른 후 결혼도 않은 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셨으며, 처음 얼마간은 편지가 왔다고 들었다. 그렇기에 혹시나 TV 속의 그 사람이 할아버지의 후손이 아닐까하는 기대가 있었다”고 말했다.

조 씨는 “할아버지가 일제의 감옥에서 나왔을 때 손톱, 발톱이 모두 빠져있을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고 들었다”라며 “혹시라도 할아버지의 후손에 대한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큰 기대가 있었는데 많이 아쉽다”고 말했다.

사마르칸트의 상인이 어릴적 지냈다는 조병하 독립운동가의 집이 있었던 Charkhin(차힌)은 사마르칸트의 Astdargʻom(아스트다곰) 지구 12개 도시형 정착지 가운데 한 지역이다.

조병하 독립운동가는 1919년 당시 여주군 주내면 상동리(州內面 上東里)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곳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협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일제의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조병하 독립운동가는 일제에 재판에서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에 근거하여 의사 발동한 것은 범죄가 아니다”라며 만세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하였으며, 감옥에서 나온 후에는 1920~30년대 많은 애국지사들과 마찬가지로 일찍이 일본과 맞선 조선의 의병과 지사들이 망명한 뒤 후사를 도모해온 러시아 연해주지역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

일제가 만든 조병하(趙柄夏) 선생의 감시대상인물카드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가 만든 조병하(趙柄夏) 선생의 감시대상인물카드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사마르칸트 상인의 말과 조사 내용에 따르면 조병하 선생은 1937년 스탈린의 명령으로 극동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우리 고려인 약 17만2천명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적으로 이주시킨 ‘한인강제이주사건’ 때 사마르칸트로 이주한 것으로 보이며, 최소한 1965년까지는 살아계셨을 것으로 추정된다.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로 정착한 사마르칸트에서 다른 민족이지만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을 도왔던 조병하 선생과 가족. 아직 그 후손의 소식은 알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어릴 때 인연으로 자신을 ‘여주사람’이라고 말하고 ‘할아버지가 여주사람’이라는 사마르칸트의 그 여인은 또 한 사람의 여주사람이다.

한편 국가보훈청 공훈전자사료관에는 조병하 선생의 묘소에 대해 알고 있는 경우 전화(☎1577-0606)를 통해 제보해주기 바란다는 안내가 게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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