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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무료한 표정으로 일어나는 기적”

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무료한 표정으로 일어나는 기적”

  • 기자명 김수영 중앙동 행정복지센터 맞춤형복지팀장
  • 입력 2023.05.04 10:40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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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형 『마음을 쓰는 일, 몸을 쓰는 시』

김수영 여주시 중앙동 민원복지팀장
김수영 여주시 중앙동 민원복지팀장

아내가 또는 남편이 냉장고를 청소했다고 하는데, 막상 냉장고 문을 열어보면 뭐가 바뀌었는지 잘 몰랐던 기억이 있으신가요? 평소 냉장고 속을 유심히 보아 오지 않은 사람들은 뭐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냥 원래 이 상태 아니었나 싶죠.

냉장고 속 물건을 꺼내고, 안을 꼼꼼히 닦고, 꺼낸 물건의 물기를 훔치고, 유통기한이 지난 것, 상해 가는 음식, 시든 채소와 과일, 오래된 건강식품 등을 버리고 정리했는데도 말이죠. 보이는 건 그냥 원래 그대로의 냉장고처럼 보이죠. 시인이자 가전제품 청소 노동자인 조수형은 이렇게 말합니다.

“냉장고의 존재는 어찌하여 우리 사는 것과 이리 닮은 것인가. 늘 같은 날들. 놀랄 만한 일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우리의 삶은 있어야 할 것이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기까지, 보이지 않는 움직임들이 끝없이 작동한다. 있어야 할 것이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는 것은 사실 작은 기적에 가깝다. 무료한 표정으로 일어나는 기적 말이다.”(56쪽)

책의 부제(副題)처럼, 이 책은 ‘시인 조수형의 가전제품 청소 노동 이야기’입니다. 시인 조수형이 하는 일은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등 가정에서 친근하게 사용하는 가전제품을 분해 청소하는 일입니다. 시인은 이 책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때론 힘들기도 하지만 때론 즐겁기도 한 나의 일과 노동. 이 지극히 수고로운 가전제품 분해와 청소라는 일을 통해 평소 내가 지향하는 세계와 그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163쪽)

가전제품 분해 청소는 고객과 긴 시간을 함께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객의 이모저모를 얼핏 알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집마다 놓여 있는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이 각기 브랜드, 연식, 구입연도 등이 다르듯 시인 조수형이 일터에서 만나는 고객들도 저마다의 모습을 갖고 있다. 감사한 고객들부터, 사연 있는 고객, 진상인 고객까지.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작가가 냉장고를 청소하러 갔는데, 40대 어름으로 보이는 아들은 버리라 하고 칠팔십 정도 돼 보이는 어머니는 그럴 때마다 뛰어오는 상황이 반복됐습니다. 냉동실에 가득한 마른 멸치 박스들을 하나하나 열어서 버리다 보니 박스 겉면에 ‘죽방멸치’라고 쓰여 있는 게 아닙니까?

‘죽방멸치’는 건멸치의 꽃이라고 불릴 정도로 멸치 종류 중 가장 질 좋고, 맛 좋기로 유명한 최상품 멸치입니다. 작가는 이날 죽방멸치 1㎏짜리 박스를 자그마치 22박스나 버렸습니다. 냉동실이 죽방멸치로 가득 채워져 있었던 것이죠. 아들이 종종 사다 드린 그 죽방멸치는 어머니의 자랑이었을 것입니다. 그 귀한 걸 누구와 나눌 생각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그렇게 냉동실에 모셔(?)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작가는 잠시 바람을 쐰다고 나와서는 담배를 피다 눈물을 흘립니다. 본인 어머니도 이랬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비싼 걸 사드리기보다는 누른 밥 한 그릇이라도 드시는 걸 옆에서 지켜보는 게 효도 아닐까”(66쪽)라고 생각합니다. 일흔도 채우지 못하시고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를 떠올리면서 말이죠.

책날개에 적힌 작가 이력을 보면, 시인은 젊은 날 신산(辛酸)스러운 삶을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20대 중반부터 오토미션 수리점을 운영하고, 원양어선에도 오르고, 룸살롱도 운영해 보는 등 여러 직업을 가졌습니다. 30대 초반에 뇌지주막하출혈이라는 병을 얻어 죽음의 문턱까지 밟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병은 “공식적인 죽음의 일”뿐, “여러 번 죽음과 동무했던”(이상 86쪽) 삶을 살았습니다. 퇴원 후 생계를 위해 구리농수산물도매시장 잡역, 보조수리기사, 방역기사 등을 하면서 시를 쓰게 됐습니다. 지금은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등의 분해 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단비’라는 업체를 부인과 같이 운영 중입니다.

지금의 부인, 정화 씨를 만난 건, 자활사업단에서였습니다. 둘 다 가진 거라고는 없었습니다. 다만 시인에게는 아들 하나가, 상대방은 장애를 가진 아들, 그리고 딸이 있었습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자신 있게 같이 살자고 말을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화 씨는 달랐습니다. 먼저 함께 살자고 몇 번인가 얘기했고, 그때마다 거절했지만 결국 같이 살게 됐습니다. 그렇게 부부의 연을 맺은 두 사람은 서로와 아이들을 무척 사랑하며 살고 있습니다.

타인의 가정집에 들어가야만 작업이 가능한 직업이다 보니 뜻하지 않게 남의 집 사정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작가가 한 해에 한 번꼴로 방문하던, 할머니 세 분이 함께 사시는 집이 있었는데 세 분 사이가 묘합니다. 세 분 할머니들의 오고 가는 말과 혼잣말로 짐작해보니 어떤 남자분의 본처, 첩, 본처인 할머니가 시집올 때 따라온 종의 딸이었습니다. 작가의 말처럼 “전설의 고향처럼 너무나 오래돼 버린 삶의 형식이 시공을 넘어 펼쳐져 있던 것”(142쪽)입니다.

시인은 이 세 할머니를 통해 나만 옳은 게 아니고, 옳다고 하는 많은 것들도 허상임을 배웠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들의 상식으론 이해도 용납도 안 되는 삶이 허다하다. 그러나 그 삶을 누구도 함부로 평가하거나 재단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분들만의 고유한 삶의 방편이고 형식이고 서사이기 때문이다.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다.”(144쪽)

시인은, “한 끼의 밥을 구하는 것 그것은 참 지엄한 일”(7쪽)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일과 노동이 신성하다고 강조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찬송가에 나오는 것처럼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살아내야 할 일상 말이죠. 무료한 일상에서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나와 당신이 지엄한 기적을 만들고 있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거창한 아포리즘이 아닌, 생활의 말(言)로 채워진 이 책이 위로가 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세상에 부대꼈고, 여러 몹쓸 사람도 만났을 테지만 작가는 사람에 대한 믿음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책이 주는 울림의 진앙지는 바로 ‘인간(성)에 대한 여전한 기대’같습니다.

“세상이 뭐라 하건 타인을 품어주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비범하고 특별한 몇몇 사람이 세상을 이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이렇게 품어주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어 우리 사회의 모난 상처들이 가려지는 게 아닐까. 내가 보인 작은 정, 손길 하나, 한 움큼의 사랑, 배려 등 이러한 것들이 어느 혁명가와 이상가들에 앞서 사회에 숨구멍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144쪽)

 

[] 책정보

『마음을 쓰는 일, 몸을 쓰는 시』   

조수형 지음

눌민,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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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형 2023-05-15 11:56:07
글을 꼼꼼이 읽어주시고 제가 지향했던 선상에서 같은 것을 느껴주셔서 더더욱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