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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삶의 품위”

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삶의 품위”

  • 기자명 김수영 팀장
  • 입력 2023.02.13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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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2』

김수영 여주시 중앙동 민원복지팀장
김수영 여주시 중앙동 민원복지팀장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적 성취를 거론할 때, 흔히 '서태지'만을 말하듯, 이 책 또한  정약현, 정약종, 정약전 등 ‘그의 형제들'에 비해 '정약용'의 무게감이 훨씬 큽니다. 정약용이, 후세(後世) 실학(實學)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학문체계에 많은 성과를 남긴 데다 공식 사료(史料)에 그의 행적이 형제들에 비해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28살에 벼슬길에 나선 정약용이 관직에 머문 기간은 약 10년으로, 정조 치세(治世) 중․후반기와 오롯이 겹칩니다. 저자는 책에서 이 시기를 '열린사회', 또는 '새 시대의 태동기’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일반 사가(史家)들도 이 시대를 이전 '영조 때'와 아울러 '조선 제2의 부흥기'라고 정의합니다. 민족사관(民族史觀) 측에서는 정조의 시대를 주체적 근세화의 출발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정조가 대중에게 '개혁' 군주의 이미지를 얻은 것은, 황인경의 『목민심서』(삼진기획, 1992), 이인화의 베스트셀러 『영원한 제국』(세계사, 1993), MBC 드라마 『이산』 등을 통해서입니다. 특히 소설 『영원한 제국』은 정조의 친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노론벽파와 정조를 지지하는 남인간의 갈등을 서스펜스 양식으로 흥미롭게 다뤄 당시 큰 인기를 모았습니다.

2009년 정조 친필 편지 발견으로, 기존 정조와 노론 벽파가 대립했다는 시각을 부정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조 사후(死後) 전개되는 역사로 볼 때 노론 벽파가 정조의 세계(世界)와 사람에계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선 말 자행된 천주교 탄압 사건인 신유박해(辛酉迫害)입니다.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도 하는데, 나이 어린 순조 대신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貞純大妃)의 주도로 일어난 옥사입니다.

이 대규모 옥사는 표면적으로는 사학(邪學)인 천주교에 대한 탄압과 금지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 사건 이면에는 남인을 중심으로 한 당시 '정조 사람들'에 대한 정치 보복 측면이 크다고 말합니다.

‘폐족(廢族)’이라는 정약용의 표현대로, 이 일로 정약용 집안은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납니다. 형인 정약종과 매형 이승훈, 조카사위 황사영이 목숨을 잃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기약 없는 유배 길에 오릅니다.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제 너희들은 망한 집안의 자손”(2권 132쪽)이라고 적습니다.

정약용은, 정조 사후(死後) 몸소 여유당 - 망설이면서(與)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처럼 주저하면서(猶)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한다는 뜻 - 이란 당호를 짓고는 주변을 조심했습니다. 그렇지만 신유박해의 회오리는 그를 비껴가지 않았습니다. 아니, 신유사옥의 칼끝은 애초부터 정약용 등의 목을 겨눴습니다.

후대(後代) 유명(有名)과 달리, 정약용의 삶은 불행했습니다. 정조 승하 1년 전인 1799년, 대사간 신헌조가 형 정약전을 탄핵하자 스스로 벼슬길에 물러난 정약용은 이후 정계(政界)로 영영 복귀하지 못합니다. 그의 나이 불과 38세 때 일입니다.

정약용이 관부(官簿)에 이름을 올렸던 기간은 10년. 아버지 정재원의 죽음을 맞아 치룬 3년 상(喪) 여막살이를 기간을 제외하면 고작 7년입니다. 그나마 관직 생활도 노론 벽파의 견제로 인해 이 자리 저 자리를 전전해야 했습니다. 정조의 총애를 받아 좌부승지까지 올랐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번번이 관재(官災)에 시달렸습니다.

신유사옥 이후 정약용은 무려 18년 동안이나 유배 생활을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노론벽파는 정약용 집안이 재기할 수 있는 길까지 막았습니다. 한 집안에 대역죄인이 나오면 집안사람들 모두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는 것을 노려 형 정약종을 극형으로 다스렸던 것입니다.

정약용의 유배생활은 곤궁하고 누추했습니다. 정약용은, 『상례사전서』에서 한 노파가 자신(정약용)을 불쌍히 여기고 자기(노파) 집에서 살도록 해 주었다라고 쓸 정도로 빈궁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도 가족들과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말입니다.

자신의 자손들은 과거길까지 막혔습니다. 당시 조선에서 과거를 볼 수 없는 양반의 자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역사상 손에 꼽는 엘리트였던 정약용의 현실은 비참, 그 자체였습니다. 임금의 총애를 받던 사람이었기에 어쩌면 그 무참함이 더 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속된 말로 목숨만 붙어 있는 산송장에 다름없었습니다.

정약용은, 하지만 그 죽음의 나날을 절망으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자포자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참혹한 시대 위에 실사구시(實事求是) 학문의 터를 닦고 대들보를 세우고, 기와를 얹었습니다. ‘실학’으로 대변되는 정약용의 학문체계는 이 유배생활 동안 집대성된 것입니다.

 

이를 두고 정약용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반드시 가장 총명한 선비가 지극히 곤궁한 지경을 만나서 종일토록 사람 소리나 수레바퀴 소리가 없는 곳에서 외롭게 지낸 뒤에야 경전과 예서(禮書)의 정미한 뜻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을 뿐이다. 천하에 이런 공교로움이 있겠느냐.”(2권, 135쪽)

 

이와 관련 형 정약전은 『사암선생연보』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령 미용(美庸:다산의 자)이 편안히 부귀를 누리며 존귀한 자리에 올라 영화롭게 되었다면 반드시 이런 책을 이룩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만약 뜻을 얻어 그의 충성과 지혜를 다했다고 한들 그가 이룬 공업(功業)은 반드시 요숭(姚崇)․송경(宋景)․한기(韓埼)․부필(富弼) 같은 사람보다 더 훌륭하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미용이 뜻을 얻지 못한 것은 고로 그 자신에게 있어 다행한 일이요, 우리 유학계에 있어서도 다행한 일이다.” (2권 215쪽)

 

권세가들은 그를 세상 밖으로 밀쳐냈지만, 그로 인해 정약용은 사람 사는 세상에 눈을 뜨고, 이를 위한 학문에 정진합니다. 삶의 품위라는 것이 그 사람의 지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닥친 고통을 견디는 자세에 있다고 한다면, 정약용은 참 품위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2』

이덕일 지음

다산북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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