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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 “곡절과 서정”

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 “곡절과 서정”

  • 기자명 김수영 중앙동 행정복지센터 맞춤형복지팀장
  • 입력 2023.02.06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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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 『눈길』

김수영 여주시 중앙동 민원복지팀장
김수영 여주시 중앙동 민원복지팀장

작년 이맘때 즈음에 비해 눈(雪)이 많이 내리는 요즘입니다. 군 복무 시절 그랬듯 공무원에게 눈은 서정과 거리가 멉니다. 눈이 내릴 때마다 밤새 도로, 가옥, 비닐하우스 등의 안전을 위해 조치를 해야 하니까요.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이듬해 농사가 풍년이라고는 하지만, 폭설의 경우 당장은 생활에 여러 위험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눈이 내릴 때면 저는 고(故) 이청준의 단편소설 「눈길」이 떠오릅니다. 사실, 저는 소설가 이청준의 작품을 즐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허영심이나 의무감으로도 읽은 적이 없습니다. 수능 세대에게는 필독서였던 그 유명한 『당신들의 천국』도 읽은 적이 없습니다. 학창(學窓) 때 문학 교과서에 실려 있던 「눈길」을 읽었고, 대학시절 『서편제』(열림원, 1998)를 읽은 게 전부라 할 수 있습니다.

에세이스트 고종석은 「눈길」을 “선생의 문학세계 변두리에 고명처럼 덧놓인 소품”(고종석. <이청준 생각>, 「한국일보」 2008. 10. 1)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한국일보」 객원논설위원이었던 고종석의 말이 아니더라도 단편 「눈길」이 이청준 문학세계 본류에서 벗어난 작품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청준이 세상을 등진 2008년,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청준을 애도하는 글에서 이청준 문학의 빛깔을 “윤리적 상상력”이라고 정의 내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 이런 식이니 그가 쓴 것치고 어느 하나 말랑말랑 한 게 없다. 소설의 초반부에는 으레 골치 아픈 질문이 던져진다. 겹겹이 꼬여 있는 플롯을 따라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것은 상큼한 해답이 아니라 더 정교해진 애초의 질문이다. 작가의 성질이 고약해서가 아니다. 난제難題와 대면해 이를 의제議題로 끌어올리려는 치열한 노력 때문이다.”(신형철, <이청준 선생님 감사합니다>, 「시사IN」48호, 2008. 8.12.)

출판사 ‘사피엔스21’에서 펴낸 작품집 『눈길』에 수록된 단편 <벌레 이야기>가 이러한 이청준의 문학세계를 어느 정도 드러내는 작품 같습니다. 이 단편은 아이를 유괴해 죽인 살인범을 아이를 잃은 어머니가 신앙의 힘으로 ‘용서’를 하려다 파국을 맞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왜소하고 남루한 인간의 불완전성”(170쪽)이 미심쩍은 신의 섭리와 부딪히며 파열과 함께 인간의 한계와 고통을 보여줍니다. 「벌레 이야기」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2007)의 원작 소설이기도 합니다.

단편 「눈길」이 이청준 문학의 다운타운에 자리 잡지 못한 작품이라지만, 저는 여전히 작가 이청준을 「눈길」의 작가로 떠올릴 것 같습니다.

「눈길」은 ‘어머니’에 대한 고전적인 정서를 담고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 자식을 위해 인고의 세월을 묵묵히 살아왔던, 집안의 불행이나 재앙을 자신의 부덕과 박복에 돌리던 어머니(들)에 대한 죄스러운 그리움 말입니다. 이청준은 ‘어머니’에 대한 정서의 원형을 코가 시큰하게 그려냈습니다.

작품에서 화자인 ‘나’는 어머니를 ‘노인’으로 칭하며 “노인에 대해선 처음부터 빚이 있을 수 없는 떳떳한 처지”(16쪽)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나’는 지속적으로 ‘노인’에 대해 ‘빚’이 없다고 거듭해서 말합니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형의 주벽으로 가계가 파산을 겪은 뒤부터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 왔습니다. 형이 세상을 떠난 후부터 형의 세 아이와 형수, 홀어머니의 생계까지 모든 책임을 져왔습니다. 노인은 ‘나’에게 무언가 베풀 처지가 못 되었고, ‘나’는 형이 지녔던 장남의 책임을 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와 ‘노인’은 결국 그런 식으로 서로 주고받을 것이 없는 처지였습니다. ‘나’는, 노인은 누구보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이 때문에 자신에 대해선 소망도 원망도 있을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내는 ‘나’의 이런 사고와 행동을 못마땅해 합니다.

‘노인’의 집을 떠나기 전날 밤, 잠자리에 누운 ‘나’를 두고 ‘노인’과 아내는, ‘나’가 아내에게 한 번도 들려준 일이 없는 “그날 새벽의 서글픈 동행”(49쪽)을 이야기합니다. 살던 집은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가 빈 집이 되었지만, ‘노인’은 그 집으로 ‘나’가 찾아올까봐 매일 청소를 하고, 집을 간수해 왔습니다. 그리고 ‘나’가 오자 따뜻한 밥상을 내옵니다.

‘노인’은 다음날 아침 학교로 떠나는 ‘나’를 배웅하기 위해 눈이 내린 새벽 산길을 아들과 함께 차부(車部)까지 같이 갑니다. 아들을 떠나 보내고 ‘노인’은 다시 아들과 걸어온 그 눈길을 밟으며 돌아옵니다. “그래서 어머님은 그 발자국 때문에 아들 생각이 더 간절하셨겠네요”라는 아내의 말에 노인은 이렇게 답합니다.

“간절하다뿐이었겄냐. 신작로를 지나고 산길을 들어서도 굽이굽이 돌아온 그 몹쓸 발자국들에 아직도 도란도란 저 아그의 목소리나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듯만 싶었제. 산비둘기만 푸르륵 날아올라도 저 아그 넋이 새가 되어 다시 돌아오는 듯 놀라지고, 나무들이 눈을 쓰고 서 있는 것만 보아도 뒤에서 금세 저 아그 모습이 뛰어나올 것만 싶었지야. 하다보니 나는 굽이굽이 외지기만 한 그 산길을 저 아그 발자국만 따라 밟고 왔더니라.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너하고 둘이 온 길을 이제는 이 몹쓸 늙은것 혼자서 너를 보내고 돌아가고 있구나!”(54쪽)

아들과 함께 걸어 온 발자국만 있는 눈길. 그 아들을 타지로 보내고 집도 없는 마을로 돌아오는 어머니. 야속한 삶처럼 펼쳐진 눈길, 시리고, 서글픈 발걸음. 아들에게 대한 미안함과 표현할 수 없는 사랑. 그 모든 것이 눈 위에 부서지고, 뽀드득 소리가 그림자마냥 뒤따라오는 눈길. ― 예전 「눈길」을 처음 읽을 때, 그만 눈이 아릿해져 당황했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백색의 길에 먹먹해진 제 마음이 회오(悔悟)로 서걱댔던 것도 말이죠.

작품집 『눈길』에 실린 단편 「서편제-남도기행1」역시 이청준의 문학세계에서 예외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의 발치에 흐르는 것은 두터운 슬픔이고 한(恨)입니다. 작중 인물들의 삶은 이로 인해 질퍽거립니다. 하지만 이들은 운명에 맞서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 소설은 1993년 임권택 감독에 의해 동명(同名)의 영화로 제작된 바 있습니다.

이청준의 작품을 읽으신다면, 영화 『밀양』과 『서편제』를 함께 추천드리고 싶네요.

 

 

『눈길』

이청준 지음

김준우 엮음

출판: 사피엔스2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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