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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운명』과 『죽음의 수용소에서』

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운명』과 『죽음의 수용소에서』

  • 기자명 김수영 여주시 중앙동 민원복지팀장
  • 입력 2022.11.04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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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과 의미 사이”

김수영 여주시 중앙동 민원복지팀장
김수영 여주시 중앙동 민원복지팀장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독일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운영한 나치강제수용소는 유대인을 대량 학살한 곳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역사 연구에 따르면 아유슈비츠에서만 1백 5십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굶주림, 가혹한 노동, 고문을 겪으면서 살해됐습니다.

이 나치강제수용소에 관한 두 권의 책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임레 케르테스의 소설 『운명』입니다. 헝가리인인 케르테스는 부다페스트에서 목재상을 하던 유대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다 열네 살의 나이로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갔습니다. 이후 독일 부헨발트 수용소와 차이즈 수용소를 거쳐 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귀향합니다. 『운명』은 케트테스의 이런 자전적인 경험이 짙게 투영된 작품입니다.

또 다른 책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Man’s Search For Meaning』(청아출판사, 2022)입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한 프랭클은 빈 대학에서 의학박사와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유대인었던 프랭클은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겪은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애썼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프랭클이 만든, 정신 요법 제3학파라 불리는 로고테라피 학파의 밑거름이 됐습니다.

『운명』의 헝가리 원제를 직역하면, ‘운명 없는 것’, ‘운명 없음’, ‘운명 없다’이지만, 번역가가 “가독성과 원작자의 의도를 고려하여 ‘운명’으로 번역”(299쪽)했다고 합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원제인 Man’s Search For Meaning 을 직역하면 ‘의미에 대한 인간의 탐구(연구)’ 정도가 될 것입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개념인 ‘삶의 의미’를 생각할 때는 원제를 직역하는 게 맞겠지만, 프랭클이 ‘의미(Meaning)’의 가치를 아유슈비츠 수용소에서 실감했던 만큼‘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번역도 괜찮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가 직접 겪었던 일이 많이 반영됐다고는 하지만 『운명』은 ‘소설(小說)’입니다. 사실에 바탕을 두고 꾸민 허구입니다. 반면 『죽음의 수용소에서는』는 ‘수기(手記)’입니다. 자신의 체험(사실)을 남들에게 알리기 위해 쓴 글입니다. 물론 『운명』은 소설이라고 하지만 사실에 바투 서 있는 허구입니다. 『운명』에서 묘사된 수용소의 모습은 프랭클이 기록한 수용소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상황과 고통, 기억을 다루고 있지만 『운명』과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서로 다른 정서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운명』의 주인공 죄르지는 수용소에서 부다페스트로 돌아와서는 “나 역시 주어진 하나의 운명을 버텨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항상 이전의 삶을 이어 갈 뿐 결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는 없다. 나는 다른 길이 아닌 주어진 나의 운명 속에서 끝까지 정직하게 걸어왔다.”(281쪽)고 말합니다.

부다페스트 노동 작업장에 가던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가다 어떠한 이유나 사정도 듣지 못한 채 갑자기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소년 죄르지. 소년은 가스실의 참혹함, 잔혹한 노동, 처참한 생활 환경 가운데에서 이 모든 것을 담담히 받아들여 갑니다. 소년에게 수용소의 삶은 ‘의미’를 찾는 과정이 아니라 그저 살아가는 ‘일상’입니다. 소년의 눈에 비친 수용소 생활은 때때로 목가(牧歌)적이기까지 합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니체의 말을 인용해 “왜why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how 상황도 견딜 수 있다.”(17쪽)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저자는 수용소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사람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인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긴직할 수’있다.”(108쪽)고 말합니다.

프랭클은은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며,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110쪽)고 강조합니다.

“아무리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마주쳤을 때에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유일한 인간의 잠재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죽음의 수용소에서』168쪽)

반면, 『운명』에서는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를 볼 수 없습니다. 그저 살아남아 수용소 체계에 잘 순응하겠다는 생각이 보일 뿐입니다. 부족한 식량을 아껴서 먹고, 강제 노동을 살짝살짝 꾀를 부려가며 수행하고, 수용소의 폭력 규칙에 순응하며 지낼 뿐입니다. 심지어는 수용소에 ‘자유’가 찾아왔을 때에도 죄르지는 자유의 소식이 수프를 먹은 다음에 전해졌더라면 좋았겠다고 안타까워합니다.

강제 수용소에 들어갈 때 1905년생인 빅터 플랭크는 마흔 살이 가까운 어른이었고 의학 박사인 인텔리였지만, 1929년생인 임레 케르테스는 소설『운명』의 주인공 죄르지처럼 열네 살 소년이었습니다. 강제 수용소의 참담한 시간을 받아들이는데 분명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운명』이 출간된 것은 1979년으로 임레 케르테스가 마흔을 훌쩍 넘겼을 때였습니다.

『운명』을 다시 읽으면서 수용소 생활 이후 30년이 넘는 동안 임레 케르테스는 왜 빅터 프랭클처럼 수용소 생활의 ‘의미’를 찾지 않은 걸까?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와 함께 임레 케르테스는 왜 ‘홀로코스트’를 다룬 기존의 작품들과는 다른 성격의 소설을 쓴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 소설, 수기를 통해 만나는 ‘홀로코스트’는 대개 수용소의 잔혹상이나 잔인함과 인간의 고결함을 대조해 표현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렇지만 『운명』은 어떠한 극적인 상황도 없습니다. “완전한 평안”도 없지만 “그렇지만 더 이상 가능성이 없을 정도로 상황을 절망적으로 인식”(199쪽)하지도 않습니다. 주어진 운명 속에서 그냥 살아갈 뿐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교훈적이며, 절망을 이겨 낼 인간의 존엄, 삶의 의미와 가치를 일깨워 줍니다. 이에 비해 『운명』은 절망적인 고통을 날것 그대로 그리고 있습니다. 느닷없이 닥친 가혹한 운명 앞에서 살아 내야 하는 인간이라는 무력한 존재. 나의 의도와 전혀 무관하게 몰아치는 운명의 횡포 앞에 결국 살아남았던 한 인간이 느꼈을 생(生)의 괴리감 ― 저는 『운명』을 읽으면서 ‘홀로코스트’를 다룬 여느 작품보다 더 깊은 슬픔을 느꼈습니다.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운명』의 죄르지가 저를 포함해 뭇사람들의 보편적인 모습일 것만 같아서입니다.

 

*도서정보

임레 케르테스 지음, 유진일 옮김,『운명』(민음사, 2018)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청아출판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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