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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의 바가바드기타와 평화 17

장주식의 바가바드기타와 평화 17

  • 기자명 장주식 작가·인문사랑방 쑈 지기
  • 입력 2022.09.21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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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높은 요기

장주식 작가·인문사랑방 쑈 지기
장주식 작가·인문사랑방 쑈 지기

지난 8월 31일 AP통신은 미국 플로리다주 리 카운티 법원이 쉴라 오리어리(39세)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세계를 놀라게 한 충격적인 사건이 알려지고 2년 만의 판결이었습니다.

2019년 9월 생후 18개월 된 아이가 영양실조로 사망했습니다. 부모는 ‘아이가 숨을 쉬지 않는다.’며 911에 신고했죠. 이 아이의 엄마가 바로 쉴라 오리어리입니다. 아이 아빠인 라이언 오리어리와 함께 부부는 비건 생활자라고 경찰에 알렸습니다.

비건은 어떠한 동물성 음식도 거부하는 완전한 채식을 추구합니다. 경찰 조사에서 오리어리 부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비건이며 과일과 채소만 먹고 있고,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막내에게 일주일간 음식을 먹이지 않았고 모유만 수유했다.”

부부는 자존심이 매우 높았고, 비건을 하는 자신들의 생활철학을 당당하게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검찰은 부부를 1급 살인과 아동학대 및 아동방치 혐의로 기소했습니다. 숨진 막내 아이 위로도 5세, 3세 두 자녀가 있는데 둘 다 심각한 저체중 상태라고 합니다.

채식은 숭고한 구도자의 식단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고기를 먹지 않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달걀이나 우유도 먹지 않는 비건은 더더욱 힘든 일입니다. 여기서 바가바드기타의 노래 한 구절을 들어보죠.

 

요가는 지나치게 많이 먹는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지나치게 굶는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너무 많이 자는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지나치게 깨어있는 자를 위한 것도 아니니라. (6-16)

 

수련의 극단을 보여주는 것이 인도의 요가입니다. 그런 요가 수행에서도 지나친 건 경계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은 먹고 자는 것이 기본입니다. 바탕이 튼튼해야 그 위에서 무엇이든 이루어질 수가 있는 것이죠.

미국 뉴욕타임스는 “채식 식단만으로도 유아 및 아동에게 필요로 하는 영양분을 공급할 수 있다. 다만 소아과 의사와 영양사의 도움을 받는 걸 전제로 한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의사와 영양사의 도움이 있다고 해도 아동에게는 비건에 해당하는 채식이 위험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문정훈 교수의 말을 들어봅니다.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3대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해야 제대로 된 발육이 이뤄집니다. 이 중 하나라도 결핍이 되면 균형이 깨지면서 체중 감소 등 신체 이상이 오게 됩니다. 채식을 하면 보통 콩에서 단백질을 공급받는데, 콩은 아이들이 먹기 힘든 식품입니다. 제대로 조리하지 않으면 소화흡수율도 낮아요.” (<리얼푸드> 재인용)

아이들은 콩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아이들이 소화하여 흡수하기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정말 아동 비건이 이뤄지려면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대목입니다.

오리어리 부부를 기소한 플로리다주 검찰청 부서장은 분노한 목소리로 쉴라를 비난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비건으로서의 자부심이 아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에 대한 무모한 무시이다.”

바가바드기타의 노래를 다시 들어보지요.

 

오, 아르주나여. 자기 자신을 남들과 같이 여기는 사람, 모든 사람의 즐거움과 아픔을 자기의 즐거움과 아픔으로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높은 요기라고 일컬어지느니라. (6-32)

 

나와 남의 경계가 없어 남의 즐거움과 아픔조차 내 것으로 느끼는 공감 능력은 요기가 가져야 할 기본입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노랫말의 ‘가장 높은 요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쉴라는 왜 그랬을까요? 아이가 영양실조로 탈수와 팔다리의 부종을 앓고 있는데도 왜 공감하지 못했을까요? 그건 아마도 검찰청 부서장의 말처럼 ‘비건으로서의 자부심’이 엄마로서 아이에 대한 공감능력보다 더 힘이 세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그 자부심이 아이의 아픔조차 외면하게 만들었을 겁니다.

노래를 하나 더 들어보지요.

 

오, 파르타여. 이 세상에서도 다음 세상에서도 그는 파멸되지 않느니라. 선을 행하는 자는 슬픈 종말을 보지 아니하느니라. (6-40)

 

쉴라의 막내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 겨우 18개월을 살다가, 그것도 지독한 영양실조를 겪다가 삶을 마감했습니다. 아울러 쉴라와 남편 라이언은 평생 감옥에서 살아야 하고, 남은 두 아이는 부모 없이 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토록 기구한 슬픈 종말을 가져온 까닭은 무엇일까요? 노래는 말합니다. ‘선을 행하는 자는 슬픈 종말을 보지 아니’ 한다고 말이죠. 슬픈 종말을 가져온 오리어리 부부는 결국 선이 아니라 ‘불선을 행한 자’라는 뜻이 됩니다.

간디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행복을 바깥 환경에 결부시키는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가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널리 드러내어 결국 불행해지고 만다.”

지나친 육식이 삶을 망치고 나아가 지구 생태계까지 망가뜨린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육식이 문제가 아니라 ‘지나친 육식’이 문제라는 것이죠. 채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친 채식’이 문제가 되는 것이죠. 채식을 하든 육식을 하든 그 이유를 ‘바깥 환경’ 탓을 하면서 이뤄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낮은 요기가 될 테니까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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