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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의 바가바드기타와 평화 16

장주식의 바가바드기타와 평화 16

  • 기자명 장주식 작가
  • 입력 2022.09.01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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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세상이 없게 되는 날

장주식 작가·인문사랑방 쑈 지기
장주식 작가·인문사랑방 쑈 지기

인도에 ‘자이나교’라고 있습니다. 기원전 6세기 불교가 탄생하던 비슷한 시기에 성립된 종교입니다. 불교가 탄생지 인도에서는 명맥이 거의 끊어졌지만, 여전히 세계 여러 나라에서 신도가 매우 많은 종교입니다. 반면 자이나교는 인도 내에서만 몇백만 명 정도 신도가 있을 뿐입니다.

자이나교 승려는 영혼의 순수성을 추구합니다. 세계를 물질과 영혼으로 나뉘는 이원론으로 바라봅니다. 물질에 속박되면 영혼이 더러워져 모든 악업이 발생한다고 봅니다. 그리하여 자이나교 승려들은 철저하게 물질을 배격합니다.

몸에 걸치는 옷도 물질이므로 거부합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알몸 그대로 생을 살아가려 합니다. 다만 처음부터 알몸으로 생활할 수 없습니다. 갓난아이부터 자이나교 승려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승려가 되고 나서 수도가 깊어지면서 한 꺼풀씩 옷을 벗을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물질에 휘둘리지 않을 정도로 깊어지면 마침내 맨몸으로 생활할 수 있지요.

자이나교 수도승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길을 걷습니다. 자이나교도 큰 사원이 있지만 수도승들은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소유욕이 생겨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수도승은 하루에 한 끼만 먹습니다. 수도 기간이 짧은 승려는 옷을 걸친 채 앉아서 밥을 먹습니다. 하지만 고행이 깊어 어느 정도 경지 오른 수도승은 알몸으로 서서 밥을 먹습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아야 하므로 숟가락이나 젓가락을 쓰지 않습니다. 두 손으로 과일이나 밥이나 죽을 받아서 먹습니다. 물로 두 손을 오무려 받아 마십니다. 밥도 물도 하루에 딱 한 번만 먹습니다.

그 밥도 주는 사람이 없으면 먹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 음식을 주더라도 음식 속에 머리카락이나 지푸라기 같은 티끌이 들어있다면 곧바로 먹기를 멈추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루나 이틀이나 사흘까지 밥 한 끼 물 한 모금도 못 마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루 20킬로미터에서 30킬로미터를 걸어야 합니다. 밤이 되도록 걷다가 집을 만나지 못하면 그냥 길바닥에서 잠을 잡니다.

자이나교 수도승은 알몸으로 걸으면서 손에 하나씩 불자(拂子)를 들고 다닙니다. 짐승의 털로 만든 먼지떨이입니다. 무소유를 근본이념으로 하는 자이나교 승려들이 왜 불자는 지니고 다닐까요? 그것은 자이나교에서 가장 중요한 ‘불살생’의 이념 때문입니다. 땅에는 수많은 생명이 살아갑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생명이 말이죠. 그래서 수도승은 자리에 앉을 때나 누울 때 혹시라도 작은 생명을 해칠까 두려워 불자를 쓸어내고 앉거나 눕는 것이죠. 길바닥에서 잠을 잘 때 모기가 알몸에 달려들면 불자로 슬며시 밀어내기도 합니다.

이쯤에서 바가바드기타의 노래 한 구절을 불러보겠습니다.

 

자기의 자아로 자신을 정복한 자에게는 그의 자아가 벗이 되지만, 자신을 정복하지 못하여 자기 자신과 반목하는 자에게는 그의 자아가 원수로 되느니라. (6-6)

사람은 선한 본성을 타고나는 것이 분명합니다. 누구나 연약한 것들에 대한 동정심과 연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악한 본성도 얼마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이 생을 살아간다는 자체가 ‘살생’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평생을 살아가며 자아의 내면에서 선악이 다투게 됩니다.

선도 악도 결국 나 자신입니다. 선한 자아가 악한 나 자신을 정복하면 나는 나의 자아와 벗이 되어 행복할 수 있습니다. 공자도 나이 칠십이 되어 서야 스스로 악한 자신을 정복할 수 있었노라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일흔 살이 되어서는, 내 마음대로 뭔가를 해도 그것이 사회적인 법규를 넘어서지 않았다.”

자기가 하고 싶은 욕망대로 일을 처리해도 그것이 사회 공공의 이익을 해치지 않았다는 고백입니다. 한 개인의 자아가 가진 욕망은 사회 공공의 이익과 충돌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자아가 가진 악한 본성을 따를 경우엔 그 파괴력이 더욱 커지죠. 그러할 땐 그 자아가 자기 자신에게만 원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의 원수가 되고 맙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라면 너무나 위험합니다.

다시 바가바드기타의 노래를 들어봅시다.

 

친척과 친구, 원수, 나그네, 중재인, 적군과 아군, 성자와 죄인을 모두 똑같이 여기는 자야말로 빼어난 자로다. (6-9)

사람의 악한 자신이 가진 강력한 힘은 ‘구별 짓기’입니다. 내 편과 네 편을 가르고 순위를 매기고 차별을 두는 것이 모두 구별 짓기에 해당합니다. 더욱 위험한 것은 편을 가르면서, 내 편의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키거나 내 편의 잘못을 옳다고 고집부릴 때입니다.

위의 노래에서는 그 모든 구별 짓기를 그만두라고 권합니다. 그러할 때 선한 자신이 악한 자신을 억누르고 이길 수 있다는 것이죠.

자이나교 수도승이 모든 물질을 내려놓고 영혼의 순수성을 추구하는 것 또한 선한 자신을 회복하여 자기 자아와 벗이 되려는 고행입니다. 영혼과 물질을 구별 지으려는 것이 아니라 선이라는 영혼이 악이라는 물질에 굴복하는 것을 힘껏 막으려는 것이죠. 물질에 굴복한다면, 우리 지구는 곧 ‘더 이상 세상이 없게 되는 날’이 온다고 합니다.

간디는 말합니다.

“흙덩이와 돌과 금은 똑같다. 셋 모두 땅에서 나왔다. 단단해진 흙이 돌이요, 금과 다이아몬드는 흙이 변질된 것이다. 우리가 탐욕을 버리기만 한다면 그것들 모두 아무 값도 없는 티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세상은 암울하기만 합니다. 눈만 뜨면 접하게 되는 동영상, 문자, 그림이 탐욕을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흙덩이와 돌과 금을 구별하여 값을 매기고, 같은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끝없이 내 자아 속의 악한 본성을 활성화시켜 내면의 자아가 싸우게 만듭니다. “이 뭣고!” 하는 용맹한 외침이 정말 필요한 때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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