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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의 바가바드기타와 평화 13

장주식의 바가바드기타와 평화 13

  • 기자명 장주식 작가·인문사랑방 쑈 지기
  • 입력 2022.07.15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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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와 포기

장주식 작가·인문사랑방 쑈 지기
장주식 작가·인문사랑방 쑈 지기

새 정부가 들어서고 두 달 정도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직 어떤 변화를 판단하기엔 매우 짧은 시간입니다. 그런데 새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누가 봐도 눈살을 찌푸릴만한 광경이죠.

지난 정부 대통령이 경상남도 양산에 퇴임 뒤 머물 사저를 마련하여 갔습니다. 그때부터입니다. 사저 앞에서 퇴임 대통령을 비방하는 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정부를 막론하고 공만 있을 순 없습니다. 당연히 실패한 부분이 있기 마련입니다. 실정이 있다면 원인을 찬찬히 따져 새 정부에선 그런 실패가 없도록 해야 마땅합니다. 그러자면 공공기관이 전문가들로 위원회를 마련하여 깊이 있게 분석하고 결론을 내야겠죠.

하지만 퇴임 대통령 사저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는 전혀 방향이 다릅니다. 전 정부의 실정에 대한 공격보다는 말초적인 인신공격성 발언이 주를 이룹니다. 더구나 문제는 시위대의 독단적인 주장만이 난무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사저가 있는 동네 주민들의 피해입니다. 긴 시간 시위가 이어지고 있지만 새 정부는 “법을 지켜서 하는 시위라면 뭐라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자, 여기서 바가바드기타의 노래를 한번 들어봅시다.

 

행위의 포기와 행위의 성취가 모두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는 도다. 그러나 이 둘 가운데 카르마요가가 산냐사보다 더 나으리라. (5-2)

 

노랫말에서 ‘카르마요가’는 ‘성취’를 뜻하고 ‘산냐사’는 ‘포기’를 뜻합니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는 이유는 뭔가 의미 있는 성취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퇴임 대통령 사저 앞에서 온갖 비난을 무릅쓰고, 시위라는 행위를 하는 주체들은 어떤 성취를 얻고 싶어 그러는 것일까요? 다양한 분석들이 나옵니다.

시위의 대상에 대한 순수한 증오, 시위의 대상이 실패한 일에 대한 성토, 나의 주장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욕망 등등. 그런데 시위 주체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SNS에 올리면서 자본 수익을 얻는다는 분석도 나왔습니다. 어떤 결과물이든 뭔가 바라는 성취가 일정 정도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위 주체들은 긴 시간 그렇게 행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취는 ‘의미 있는’ 것이어야 아름답습니다. 노랫말에서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는 성취는 바로 의미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행위의 포기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취보다는 포기가 훨씬 어렵기 때문입니다. 퇴임 대통령 양산 사저 앞 시위가 포기를 모르고 계속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양산 사저 앞 시위가 도대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 맞불이 지펴집니다. 퇴임 대통령을 지지한다는 세력 중 극히 일부가 현임 대통령의 사저 앞에서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 가장 큰 도시인 서울 한복판에서 방송 차를 가져다 놓고 시위합니다. 현 정부는 “법을 지켜서 한다면 어쩔 수 없다.”라고 발표했었기 때문에 이 시위대도 해산할 수 없습니다. 주간과 야간에 제한한 소리의 데시벨을 맞춰 트는 방송은 ‘합법적’이기 때문이죠.

이젠 경남 양산 사저 주변 주민뿐 아니라 서울 서초동 사저 주변 주민들도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시위대는 주민들 고통 호소는 모른 체 합니다. 주민들의 호소는 내가 이루고자 하는 성취의 단맛을 위해 간단하게 무시하는 것이죠.

여기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과연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일까요? 양산일까요? 서초동일까요? 각 시위대의 주장은 사실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비난이 주요 테마란 점에서 그렇죠.

 

바가바드기타의 노래를 더 들어보지요.

 

좋아하는 것도 없고 좋아하지 않는 것도 없는 그런 사람을 두고 행위를 포기했다고 할 수 있으리니, 이는 서로 반대되는 양극을 벗어난 자만이 그 속박에서 쉽게 풀려나기 때문이로다. (5-3)

 

노랫말에서 ‘양극을 벗어난 자’라는 말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옵니다. 상대방에 대한 비난만이 중심에 있다면, 그런 비난을 하는 주체는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산과 서초동의 시위대는 그런 ‘양극’을 잘 보여줍니다.

행위의 포기는 양극을 벗어난 자만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극단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 극단이 주는 힘에 사로잡혀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극단에서 벗어나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노래는 가르쳐 줍니다.

 

‘좋아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것도 없어야 한다.’

 

이 가르침은 따르기가 무척 어려워 보이긴 합니다. 사람이 어찌 ‘호불호’가 없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극단에서 벗어나려면 호불호 자체를 버려야 한다고 하니,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습니다.

성취보다는 포기가 어려운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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