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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의 바가바드기타와 평화 12

장주식의 바가바드기타와 평화 12

  • 기자명 장주식 작가·인문사랑방 쑈 지기
  • 입력 2022.06.23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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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이 따뜻하고 넉넉한

장주식 작가·인문사랑방 쑈 지기
장주식 작가·인문사랑방 쑈 지기

어떤 화원의 이야기입니다. 씨 뿌리거나 꺾꽂이하여 꽃모종을 만들어 두고 판매합니다. 손님은 여러 모종 중에 당연히 튼실해 보이는 것으로 고릅니다. 이때 손님이 주인에게 골라달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인의 행동은 다양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모종 중 누가 봐도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주는 주인이 있을 수 있고,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주는 주인도 있겠고, 잘 팔리지 않을 것 같은 모종을 골라 주는 주인도 있을 수 있습니다.

주인의 여러 가지 행동 중에 가장 돋보이는 건 어떤 것일까요? 누구나 똑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있는 것 중 최상의 모종을 골라 주는 주인의 행동이죠.

꽃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과일도 마찬가지고, 곡물이나, 뭐 모든 물건이 다 비슷할 겁니다. 참외나 수박을 골라 준다고 해 봅시다. 손님이 왔을 바로 그때, 가장 좋은 것을 내주면 손님은 굉장히 기분이 좋을 겁니다. 다음 손님이 왔을 때도 마찬가지지요. 바로 그때 있는 물건 중에 가장 좋은 것을 내주면 됩니다. 다음, 그다음 손님도 마찬가지지요. 결국 새로운 손님이 올 때마다 손님은 자신이 최상품을 샀다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바가바드기타의 노래를 하나 들어 봅시다.

사람들이 어떤 길로 내게 호소하든 나는 그들의 호소를 들어주느니라. 오, 파르타여. 어떤 길이든, 사람들이 나를 따르는 그 길은 내 것이니라. (4-11)

 

노래에서 ‘호소’를 손님들이 ‘좋은 걸로 줘요.’라는 주문으로 바꿔볼까요. 가게 주인인 나는 손님들의 호소를 들어줍니다. 호소를 잘 들어주는 주인이 있는 가게에 손님은 몰려오게 되겠지요.

우리는 이 간단한 논리를 잊고 삽니다. 귤을 한 상자 사다 놓고 먹을 때엔 가장 싱싱한 놈부터 먹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귤을 다 먹을 때까지 남은 귤 중에서 가장 싱싱한 놈을 계속 먹게 되겠지요. 반대로 상하려고 하는 놈이 아깝다고 상하려는 놈부터 먹게 되면 귤을 다 먹을 때까지 결국 상해 가는 녀석만 먹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위들이 이기적인 계산을 속내에 깔고 있으면 또한 자연스러울 수는 없습니다.

 

간디는 “사람들이 동전을 헤아릴 때만 사악함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악한 욕망은 ‘동전을 헤아리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계산이 가득한 세상의 지배자란 뜻입니다.

하지만 또 간디는 말합니다.

“그러나 선은 한 사람의 인격 안에서라도 완벽하게 체현되면 세상을 다스린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의 선은 그 선한 전파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공자도 수제자 안회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안회가 여쭈었다.

“선생님, 과연 인이란 무엇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나를 이기고 예를 회복하는 것이 곧 인을 실천하는 길이다. 단 하루라도 나를 이기고 예를 회복할 수 있다면 온 세상이 인으로 돌아올 것이다. 인을 실천하는 건 나를 위해 하는 일이지 다른 사람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다.”>(논어 안연편)

인은 공자 철학의 바탕입니다. 인은 연민, 사랑, 베풀기 등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공자는 인이란 ‘나를 이기고 예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공자는 예를 뭐라고 풀까요? 예는 검소함과 겸손함이 바탕이라고 말합니다. 또 장소와 대상과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예라고 했습니다. 예는 사람 사이에 소통을 부드럽게 하는 도구라고도 했죠. 예의가 있는 사람은 스스로 욕망을 이길 수 있다고 하여 ‘극기’라고 했습니다.

공자가 말하는 ‘인’은 간디가 말하는 ‘선’과 잘 닮았습니다. 선의 효과가 세상을 다스린다는 간디의 말이나 인의 효과가 온 세상을 인하게 만드는 길이라는 것도 같습니다.

 

바가바드기타에서도 선과 인이 인격 안에서 완벽하게 체현된 모습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 언제나 만족하며 모든 의존에서 해방된 사람, 그 사람은 행위를 하지만 아무 짓도 하지 않는 도다. (4-20)

 

다시 물건을 파는 가게 주인을 생각해 봅시다. 내가 손님에게 좋은 물건을 주면 손님이 늘어나고, 나는 돈을 많이 벌 거라는 생각은 조금 계산이 들어 있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런 실천이 늘 하는 자연스러운 습관처럼 된다면 마침내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손님이 좋아하는 그 모습을 보는 것이 만족스럽고 돈을 많이 벌어야지 하는 욕망에서조차 해방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런 상태의 행위를 ‘아무 짓도 하지 않는’ 행위라고 합니다. 마치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와 닮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다하는 것. 그것이 무위입니다. 노자는 무위하는 사람은 ‘공을 세운 뒤엔 자리에서 물러나며’ ‘이루어주고는 기대지 않으며’ ‘낳고는 가지지 않는’ 그런 행동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무위하는 사람 옆은 늘 따뜻하고 넉넉한 기운이 감돌기 마련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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