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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의 바가바드기타와 평화 9

장주식의 바가바드기타와 평화 9

  • 기자명 장주식 /작가
  • 입력 2022.05.11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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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얼굴을 한 무늬

장주식 작가·인문사랑방 쑈 지기
장주식 작가·인문사랑방 쑈 지기

사진 한 장을 봤습니다. 우크라이나 한 마을 어느 집 창고 안입니다. 중년 여인이 고양이를 안고 바닥을 내려다봅니다. 바닥에는 두 남자가 있습니다. 한 남자는 모로 누웠고 한 남자는 엎드려있습니다. 사진 설명에 따르면 두 남자 중 한 명은 여인의 동생이고 한 명은 남편입니다. 남자들은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러시아군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두 남자는 군인도 아닌 평범한 민간인입니다.

여인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을 두 남자. 두 남자의 시신을 내려다보는 여인의 표정은 읽어내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슬픔도, 절망도, 분노도, 아니 당황함마저도 여인의 얼굴에선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텅 비어버렸다고나 할까요. 모든 감정이 소거된 그런 얼굴.

사진의 설명에는 우크라이나 곳곳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덧붙입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일어난 전쟁이 빚은 참극입니다. 전쟁은 전쟁을 일으키는 자가 가진 욕망 때문입니다. 인간은 욕망의 결정체입니다. 인간의 생존 자체가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죠. 먹고 입고 자는 일상이 다 욕망덩어리입니다. 고픈 배를 채우면 그만이 아니라 맛집을 찾아다니고, 추위와 부끄러움을 가리면 그만이 아니라 온갖 모양을 내는 패션을 원하고, 더 큰 집 더 비싼 집을 추구하는 욕망 말입니다. 그 외에도 인간이 채워지길 원하는 욕망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토록 바라는 욕망은 채울수록 욕망의 공간이 점점 더 커질 뿐 결코 채워질 수 없습니다. 욕망은 더 큰 욕망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음식도, 잠도, 권력도, 부도, 명예도 그 어떤 욕망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 간에 벌어지는 전쟁은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권력자가 가진 가장 비극적인 욕망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 걸까요? 한 가지 희망은 있습니다. 인간은 평화를 바라는 욕망 또한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가바드기타의 노래를 들어봅시다.

희생제사와 더불어 모든 존재의 주인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이르셨도다.

“이로써 너희는 신들을 소중히 기르고 신들은 너희를 소중히 기를지어다. 그렇게 서로 소중히 기름으로써 너희는 지고선에 이르느니라.” (3-10, 11)

인간이 한 생애를 살아가는 동안 선과 악이 갈마드는 욕망을 떨쳐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선한 욕망을 가질 수 있는데, 그것은 ‘노래’에서처럼 ‘신과 인간이 서로 소중히 기르는’ 것입니다. 신이 인간을 품어 안고 인간이 신을 품는 건 수단까지도 선한 욕망입니다. 신의 품에 안겨 스스로 욕망을 비워내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멈출 줄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산속의 절에 찾아가 큰 스님에게 자신의 괴로운 인생을 호소합니다. 태어나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고 짐이 무거워 숨도 쉬기 어렵다고요. 그러자 스님이 말했습니다.

“내려놓게.”

“무얼 말입니까?”

“그대를 그토록 괴롭히는 모든 것들을 말일세.”

“그게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자식도 그렇고, 직장도 그렇고, 만나는 사람들도 그렇고….”

“그럼, 그냥 들고 있게.”

“…….”

스님을 찾아온 사람은 말을 잇지 못했지만, 절을 떠날 땐 밝은 얼굴이었습니다. 스님에게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다 털어놓아 마음이 편해졌는지, 아니면 스님의 말에서 깨달음을 얻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분명 ‘신을 품에 안았을’ 것입니다.

요즘 세간의 유행어에 ‘000이 000했다’라는 게 있습니다. 어떤 경지에 도달한 인물이 그 경지에 걸맞거나 그 경지를 넘어서는 결과를 이뤄냈을 때 쓰는 말입니다. 예컨대 세계적인 추구 스타 손흥민이 또 멋진 골을 성공한다면 ‘손흥민이 손흥민했다.’는 유행어를 써먹을 수 있는 것이죠.

이 유행어는 사실 스스로 만족하는 자족, 만족할 줄 아는 지족을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예전부터 ‘햇빛이 해다’라는 말도 있었거든요. 바가바드기타에서는 ‘브라만이 브라만 안에서 브라만을 통하여 스스로 그 모든 즐거움을 누린다.’고 합니다. 브라만은 인도 힌두교에서 세상 만물을 창조하고 지배하는 우주 최고의 신으로 숭배됩니다. 인간도 신의 품에 안기거나 신을 품에 안는 그 순간에는 역시 브라만이 되는 것이죠.

이때에는 개인적 자아인 ‘아트만’이 우주적 자아인 ‘파라마트만’이 되기도 한답니다. 말하자면 손흥민이 손흥민 했다고 할 때에, 앞의 손흥민은 아트만이요 뒤의 손흥민은 파라마트만이란 겁니다. 개인적인 자아를 넘어 우주적인 자아가 된 것이니까요. 여기서 바가바드기타의 노래를 하나 더 들어봅시다.

행위는 브라만한테서 나오고 브라만은 불멸하시는 분한테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지어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 충만한 브라만은 희생제사에 그 뿌리를 든든히 내리느니라. (3-15)

노래에서 ‘희생제사’란 인도에서 야즈나라고 부릅니다. 간디는 ‘인간은 누군가를 의존하여 태어나고 의존하여 죽는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야즈나의 정신으로 하는 것이 그를 위해 최선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야즈나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경건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상을 살아가라는 주문입니다. 세상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으니 삶 자체가 어찌 야즈나가 아닐 수 있겠습니까. 영국의 압제에 맞서 비폭력으로 인도를 독립하려 할 때, 간디의 야즈나는 ‘물레질’이었습니다. 남을 섬기기 위한 모든 행위는 야즈나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한 그루 나무를 심는 육체노동도 야즈나이며 마음의 평화를 위해 음악을 듣는 행위도 야즈나입니다. 다만 그 행위들이 서로를 소중하게 기르려는 마음을 바탕에 가지고 있어야 야즈나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심은 나무가 땅에 비를 내리게 할 것이라는 믿음, 내가 듣는 음악을 만든 이에게 감사하는 마음 같은 것들이죠.

과연 내 일상의 야즈나는 무엇일까요? 작가인 나의 야즈나는 독서와 글쓰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한 낱말 한 낱말 한 문장 한 문장 벼리고 벼려서 세상 모든 것에 충만한 브라만을 드러낼 수 있어야겠지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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