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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여주의 유산’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칼럼- ‘여주의 유산’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 기자명 이장호 기자
  • 입력 2022.04.19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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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이장호
발행인 이장호

최근 문화재위원회와 무형문화재위원회는 재화 개념의 ‘문화재’ 명칭을 역사와 정신을 포함한 ‘유산(遺産)’으로 바꾸고, 분류체계도 문화유산과 자연유산, 무형유산으로 바꿔 지역 공동체 원천과 미래유산까지 포괄하는 확장된 개념으로 하자는 의견을 문화재청에 제출했다. 이에 따라 앞으로는 그동안 관리 사각지대에 있던 비지정문화재에 ‘목록유산’ 개념을 새로 만들어 비지정문화재 중 보호 가치가 있는 향토유산의 법적 개념과 지원 근거도 마련된다고 한다.

우선은 반갑다는 생각이다.

우리나라가 문화재보호법을 만들 때 일본의 관련 법령을 상당부분 따랐기 때문에 1999년 문화재관리국이 승격될 때도 기관 명칭을 놓고 ‘문화재청’과 ‘문화유산청’이 부딪치기도 했다는 점에서 반갑고, 보호 가치가 있는 향토유산의 법적 개념과 지원 근거도 마련된다는 점에서 진일보 했다고 생각한다.

여주사람들은 여주에 대한 자긍심이 높다. 그 자긍심의 뿌리는 쌀과 도자기와 같이 지금도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것 뿐 아니라, 여주의 역사와 역사적 가치를 지닌 장소 그리고 유적 등 역사유산과 문화유산을 더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여주를 ‘경기도의 경주’라고 부르거나 ‘경기도의 보물창고’라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자긍심의 뿌리인 지역의 역사와 문화유산, 자연유산을 지키고 보전하는 일에 얼마나 관심이 높을까?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자니 참으로 민망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여주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곳은 낫다지만, 엉터리 표지판과 낡은 표지판이 아직도 곳곳에서 보일 정도다. 이러니 향토유적에 이름도 올리지 못한 유산들은 어떨까? 그 대표적인 사례가 여주시 단현동의 ‘단암(丹巖)’과 신륵사 강월헌 강변 바위 ‘동대(東臺)’라는 금석문이다. 신륵사 동대(東臺)의 금석문은 19세기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듯이 그나마 원형에 가깝게 남아있다. 그러나 단현동 ‘단암(丹巖)’의 일부 글자는 세월에 마모돼 판독이 불가하다고 한다.

유적은 잘 보전해 후대에 물려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의 사람들이 접근해 옛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것을 알 수 있는 교과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접근이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되는 단현동 ‘단암(丹巖)’과 접근하기가 어려운 위치에 있는 신륵사 동대(東臺)에 대한 시민들의 역사유산 접근권 보장을 위한 대책이 절실하다.

특히 단현동 ‘단암(丹巖)’의 경우 그 경로가 여강길 제1코스의 나루터길 중간쯤에 위치해 접근이 막힐 경우, 걷는 길로 여주의 이름을 높이고 있는 ‘여강길’이라는 자연유산도 손상된다는 점에서 개인의 재산권을 보장하는 동시에 여주시의 유산인 ‘단암(丹巖)’과 ‘여강길’을 활용하기 위한 지혜가 필요하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우리 고장 여주에 대해 ‘경기도의 경주’나 ‘경기도의 보물창고’라고 자랑하는 만큼 그에 걸맞은 유산을 관리하기 위한 지속가능한 방안을 만들어 내야한다.

점동면 경안궁주와 제간공 권규 묘역, 세종대왕면 ‘영릉 망배소’와 ‘단암(丹巖)’, ‘동대(東臺)’ 그리고 아직 발견되지 못한 여러 역사문화유산에 대한 조사와 시민들의 유산 접근권 보장 등 다양한 방법으로 여주의 유산을 보전하고 향유하기 위해 여주시에 문화유산관리를 위한 민관합동기구를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잘 찾아 가꾸고 지켜야 하는 것이 ‘경기도의 보물창고’를 가진 여주사람들의 의무인 동시에 시대적 사명일 것이다.

사족을 달자면 단현동의 금석문 ‘단암(丹巖)’은 숙종 때 문신인 문충공 민진원(閔鎭遠)의 호다. 민진원은 숙종 비인 인현왕후의 오빠로, 그는 현재 여주시 단현동(丹峴洞)에 90여 칸짜리 집을 짓고 남한강가에 침석정(沈石亭)이라는 누각을 세웠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이고, 지금의 여주시 능현동에 있는 고종황제의 비인 명성황후(明成皇后) 생가는 민유중의 묘막(墓幕)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또 능현동의 민유중 묘 부근 신도비에 새겨진 여양부원군민유중신도비전액(驪陽府院君閔維重神道碑篆額)은 그의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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