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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의 바가바드기타와 평화 7

장주식의 바가바드기타와 평화 7

  • 기자명 장주식 작가·인문사랑방 쑈 지기
  • 입력 2022.04.13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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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망을 넘어 단식하는 사람의 무늬

장주식 작가·인문사랑방 쑈 지기
장주식 작가·인문사랑방 쑈 지기

어제 넷이 식당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한정식이라 여러 반찬이 있었고 그중에 제육볶음과 돼지고기 보쌈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채소 반찬은 더 달라고 하여 먹었지만 고기 반찬은 대부분 그냥 남았습니다. 네 명 중 셋이 제육과 보쌈을 단 한 점도 먹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 보쌈 두 점과 제육을 조금 먹었을 뿐이죠.

내가 “많이 남아 아깝다.” 했더니 강아지 키우면 가져가라고 앞에 앉은 사람이 얘기하더군요. 그러면서 “고기는 영 입에 맞지 않는다.” 하기에 내가 “잘 타고 나셨네요. 요즘 육식을 줄여야 지구가 산다고들 얘기하는데, 육식을 아주 자연스럽게 안 하시니 말입니다.” 그 사람은 피식 웃고 말더군요. 조금 뒤 내가 젓가락으로 제육을 집어 먹으니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육식을 안 하는 것이 좋다면서 또 드시네요.”

“이게 잘 안 됩니다. 고기란 게 한 번 맛을 들여놓으면 자꾸 당기는 거라.”

나는 얼른 젓가락을 놓으면서 응답했습니다. 맞습니다. 고기만이 아니라 음식은 다 그렇죠. 한번 맛 들여놓으면 끊기가 정말 어렵죠. 음식에 대한 갈망만큼 본래적인 것도 없으니까요.

 

바가바드기타 노래를 하나 들어봅시다.

 

사람이 자신의 감각을 쇠약하게 만들 때 감각의 대상들이 그에게서 사라져가지만, 그것들을 바라는 갈망은 사라지지 않느니라. 그가 지고자(지극히 높은 사람)를 붙잡을 때 마침내 갈망까지도 사라지느니라. (2-59)

 

감각을 쇠약하게 만든다는 것을 무엇일까요? 아마도 단식이 가장 중요한 방법일 것 같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몸이 갈망해 마지않는 음식을 끊어버리는 일, 그것만큼 어려운 일이 있을까요.

인도 뱅골에서 16세기에 살았던 종교개혁가 차이타니아는 단식의 극한을 보여줬다고 합니다. 차이타니아는 설탕 한 덩어리를 자기 혀 위에 올려놓았다고 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혀 위의 설탕은 녹지 않고 오히려 돌멩이처럼 굳어갔다고 합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까닭을 간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감각의 대상에 대한 갈망이 완전히 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맛을 아는 것은 혀가 아니라 마음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간디의 설명을 들어도 차이타니아의 경지에 대하여 선뜻 이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설탕은 워낙 잘 녹는 물질이라, 혀에 있는 침과 섞이면 곧바로 녹아 버릴 텐데 말입니다. 아마 차이타니아는 혀 위에 침도 말라버렸던 모양입니다.

어쨌든 차이타니아는 실존 인물이고 기록도 있으니 그 경지를 믿어야 할 듯합니다. 세상에는 얼마나 기이한 일들이 많은지요.

다만 갈망과 단식이 그리는 무늬에 대하여 얘기를 이어가고 싶은데요. 나 같은 경우에는 육식을 중단하는 일보다는 금주를 하는 일이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술이 주는 얼큰한 감각을 사랑하기 때문인데요. 물론 같이 술자리 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분위기도 좋아하지요.

금주하는 일은 혀 위에 설탕을 놓고 녹이지 않는 일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금주 대신에 적절한 양의 음주를 하고 멈추는 경지는 어떨까요. 물론 이것도 매우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바가바드기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현자의 진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 카운테야여, 휘어잡을 수 없는 감각들이 억지로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도다. (2-60)

 

후회와 반성을 거듭하며 며칠씩 금주하는 진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음주자가 술을 참는 일은 몹시 힘이 듭니다. 술이 몸에 들어왔을 때 알알이 깨어나는 감각의 즐거움을 뿌리칠 수 없지요. 이미 그 감각들은 나에게 휘어 잡히지 않고 제멋대로 춤을 출 테니까요. 내가 스스로 억제하는 힘을 비웃으며 감각은 술이라는 대상을 향해 치달아 갑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간디는 대중에게 경고합니다.

“감각의 대상에 계속 머물러 있는 사람은 궁극의 파멸을 안고 있는 것이다. 자살을 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궁극의 파멸, 자살 같은 낱말들이 섬뜩합니다. 그렇다면 감각에 끝내 휘둘리는 내 마음을 안정시킬 방법은 없을까요? 당연히 있습니다. 간디가 제시하는 세 가지 방법을 알아볼게요.

첫째 믿음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겠군요. 신앙은 종교적인 태도를 갖는 다는 것이므로 특정 종교를 강제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오롯이 몸과 마음을 경건하게 바칠 대상이면 충분합니다. 신앙은 내가 감각에 휘둘리는 마음을 억제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죠.

둘째 감각을 복종시켜야 할 필요성에 대한 신념입니다. 이 신념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인류는 의지의 각성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에 걸맞은 행동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지요. 술이라는 감각의 대상에 사로잡혀 있을 때 어떤 파멸적인 행위가 일어나는지 각성해야 하는 것이죠. 물론 그 각성에 따라 감각을 복종시켰을 때 도달하는 희열의 경지에 대한 신념을 가져야 하는 것이고요. 몇 잔 먹고 적절한 취기를 유지하며 화기애애한 자리를 만든다면 술이라는 음식은 충분히 매력적인 것이죠. 술은 취하면 멈추어야 하는 것인데 더 마시면 추해집니다.

셋째 육신을 지탱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음식은 먹지 않기입니다. 내 배를 위하여 먹어야지 과시하기 위해 음식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주장을 따르자면 모든 기호식품은 먹지 말아야겠군요. 이 역시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감각에 휘어 잡혀 끌려다니면 파멸과 자살을 부른다는 섬뜩한 경고를 잊지 말아야겠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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