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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의 바가바드기타와 평화 4

장주식의 바가바드기타와 평화 4

  • 기자명 장주식 작가
  • 입력 2022.02.28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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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태도의 무늬, 단호한 지력에 대하여

장주식 작가·인문사랑방 쑈 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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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지식과 태도의 무늬에 대하여 말하려고 합니다.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는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이 문장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이 한 문장으로 독자는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게 됩니다. 말을 지루하게 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두괄식으로 이야기하라고 주문하게 되지요. 미리 핵심을 좀 얘기하라는 뜻인데요,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은 그 모범을 보여줍니다. 독자들은 첫 문장만 보고도 행복과 불행에 대하여 이야기하겠구나, 불행한 가정의 나름나름 이유와 갈등이 펼쳐지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고만고만’하다는 표현과 ‘나름나름’이라는 표현은 번역자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고만고만하다는 건 ‘서로 닮았다’거나 ‘별 차이가 없다’는 의미를 갖는다는 데에 누구나 동의합니다. 나름나름이라는 표현도 ‘저마다 다르다’거나 ‘저마다 이유가 있다’라는 의미로 다들 읽습니다.

 

지식과 태도가 가지는 무늬가 상당한 경지에 도달하면 ‘서로 닮게 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스개로 이런 말을 하곤 하죠. 부처와 예수와 마호멧은 서로 잘 통하는데, 그 추종자들이 자기만 잘났다고 싸운다고 말이죠. 부처와 예수와 마호멧은 인간으로서 상당한 경지에 도달했기에, 서로 닮았고 이미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선과 최고 행복을 누리는 위치에 있다는 겁니다.

다만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추종자들이 각자 나름의 이유로 다투며 서로 불행하게 하고 있다고 진단할 수도 있겠습니다. 바가바드기타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크리슈나의 노래를 들어보지요.

이 일에 있어서는, 늘 그렇듯이 단호한 결심에서 솟구쳐 나오는 태도란 하나뿐이니라. 오, 쿠루난다여. 그러나 단호한 결심을 내리지 못한 자들의 태도는 가지각색이요 또 끝이 없도다. (2-41)

지식과 태도가 가지는 아름다운 무늬는 일종의 ‘단호함’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단호한 결심을 내리지 못하면 가지각색의 변명을 내세우고 또 변명은 끝이 없다고 크리슈나가 노래하고 있지요. 마치 안나 카레니나의 불행한 가정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단호한 무늬’를 가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요. 아주 작은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집을 떠나 몇 시간이나 며칠 씩 여행을 갈 때 자주 잊어버리곤, 아이코! 하는 게 있습니다. 텀블러나 작은 보온병을 가방에 넣어 가는 일 말입니다. 커피를 사서 마실 때에 텀블러나 보온병에 받으려는 것인데, 자주 잊는 것이죠. 음식을 배달시킬 때에도 일회용 그릇을 쓰지 말고 그릇에 가져다주면 설거지를 해서 되돌려 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몇 번은 그렇게 하지만 자주 깜빡하고 그저 식당에서 보내주는 일회용 그릇을 받고는 합니다. 이런 작은 일도 다 단호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죠.

아주 작은 일에도 단호하지 못한 까닭은 ‘한 가지 목표에 마음을 쏟아 분별력을 가지고 거기에 매달리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간디는 진단합니다. 한 가지 목표에 마음을 쏟지 못함으로써, 우리는 가지각색의 변명거리들을 늘어놓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추구하는 한 가지 목표에 마음을 쏟지 못할까요? 그것은 쾌락과 권력을 갈망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쾌락은 우리가 추구하는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는 길을 막고 선 강력한 힘입니다. 쾌락은 보통 우리가 가진 모든 감각으로 달려듭니다. 눈, 귀, 코, 입, 촉감은 물론 정신적인 상상의 쾌락도 있습니다. 우리가 감각의 쾌락에 몰두할 때엔 내가 추구하는 목표가 마구 뒤흔들릴 것입니다. 아울러 쾌락을 추구하는 이유를 가지각색으로 찾아내겠지요. 또한 권력이란 건 인간이 즐기는 가장 강력한 쾌락 중에 하나입니다. 따라서 쾌락과 권력을 갈망한다는 것은 쾌락과 권력 그 자체가 목표이기 때문에, 인간이 도달하고 싶은 진정한 행복에는 결코 도달할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크리슈나의 노래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쾌락과 고통, 얻음과 잃음, 승리와 패배를 똑같이 여기고 싸움에 임하여 허리띠를 단단히 매고 있을지어다. 그렇게 하면 죄를 짓게 되지 아니하리라. (2-38)

이제까지 나는 그대에게 지식의 태도를 보여주었거니와 여기에 그 행위의 태도가 있도다. 이 태도에 힘입어 그대는 행위의 사슬을 벗어버릴 수 있느니라 (2-39)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이게 좋을까, 저게 좋을까, 이건가? 아니지 그게 아니지. 우리는 날마다 흔들립니다. 어떤 결정을 앞두고 있을 때 단호하지 못합니다. 갈팡질팡하고 쩔쩔 매면서 때로는 자괴감에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크리슈나에 따르면 ‘허리띠를 단단히 매고 있지’ 못하여 그렇습니다. 허리띠를 단단히 맨다는 건 쾌락과 고통, 얻음과 잃음, 승리와 패배를 똑 같이 여겨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쾌락과 얻음과 승리를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단호하지 못한 까닭이 바로 그렇습니다. 고통이 싫고 잃는 것이 싫고 패배가 싫어서 우물쭈물합니다. 단호하려면 고통과 잃음과 실패도 받아들일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이죠.

고통과 잃음과 실패를 받아들이는 마음, 그것을 나는 겸손함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노자는 자신이 가진 최고 보물 세 가지를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상대에게 믿음을 줍니다. 겸손함은 자기 자신을 믿는 경지에서 나오는 태도이기에 그렇습니다. 자기를 믿으면서도 타자에게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야 말로 가장 훌륭한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함은 크리슈나가 보여주는 지식의 태도이며, 이 지식의 태도는 단호한 행위를 가져옵니다. 쾌락과 얻음과 승리에 얽매이는 행위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말이죠. 바로 이런 사람이 단호한 지력을 가진 높은 경지의 지식과 태도의 무늬를 보여줍니다. 당연히 이 런 사람은 지식의 많고 적음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단호한 지력으로 보여주는 그 무늬는 그 어떤 학벌보다도 아름다우니까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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