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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의 바가바드기타와 평화 3

장주식의 바가바드기타와 평화 3

  • 기자명 장주식
  • 입력 2022.02.14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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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 작가·인문사랑방 쑈 지기
장주식 작가·인문사랑방 쑈 지기

며칠 전 <우리의 지구> 라는 다큐멘터리를 봤습니다. 총 8부작으로 제작진의 엄청난 노력이 투입된 작품입니다. 최신 기기로 찍어낸 지구는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절정의 아름다움 속에 깊은 슬픔이 깃들어 있습니다.

진한 여운이 남은 것은 극지방 영상들입니다. 지구에는 3개의 극지가 있습니다. 남극과 북극 그리고 중극이라 할 수 있는 히말라야산맥입니다. 이 극지들은 모두 빙하가 있어 ‘빙극’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극지들도 봄이 되면 해빙이 되어 바닷물에 떠다니는 유빙이 생겨납니다. 남극의 유빙 아래에는 녹조류가 붙어 있습니다. 녹조류를 먹기 위해 크릴새우 떼가 오고 크릴새우를 먹으려고 펭귄이 오고 크릴새우와 펭귄을 먹으려고 고래가 옵니다. 북극에서는 북극곰이 눈 덮인 얼음 위에서 바다표범을 사냥합니다.

영상은 가슴이 뛸 정도로 극치미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구가 너무나 신비롭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곧 깊은 슬픔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남극에서는 바다코끼리가 절벽에서 떨어져 생을 마감합니다. 빙하가 녹아 사라졌기 때문에 바다코끼리들이 머물 곳이 없기에 그렇습니다. 북극에서는 잔뜩 야윈 채 겨우 걸음을 옮기는 북극곰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빙하가 사라진 바다를 바라봅니다.

영상에서 중극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만, 현재 히말라야 빙하도 속절없이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노르드 신화(북유럽 신화)에서 천지를 창조한 창세신은 ‘아우둠라’라 불리는 암소입니다. 아우둠라는 거대한 얼음덩어리에서 생겨납니다. 이 얼음덩어리는 히말라야 빙하를 상징합니다. 얼음덩어리에서 생겨난 아우둠라는 얼음을 핥으면서 거인 위미르와 아름다운 신 부리를 먹여 살립니다. 아우둠라의 커다란 젖통에서 나오는 젖을 위미르와 부리가 빨아 먹거든요. 위미르는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에서 거인들을 낳는데 이들은 수증기의 독을 먹고 자라 악한 신을 상징합니다. 반면 부리는 착한 신들인 오딘과 빌리와 베의를 낳는 보르의 아버지입니다.

오딘 3형제가 힘을 합쳐 위미르를 죽이고 그 시체를 버리자 천지가 창조됩니다. 위미르의 머리털은 숲, 뼈는 산, 피는 바다와 호수, 뇌수는 구름, 이빨은 바위와 돌이 되지요. 그다음 오딘 3형제는 물푸레나무(아스크)와 담쟁이덩굴(엠블라)을 깎아 사람을 만들고 숨과 지혜를 불어넣습니다.

이 신화에서 주목할 것은 위미르와 부리가 빨고 있는 아우둠라의 젖입니다. 아우둠라가 뿜어내는 젖은 큰 강이 되거든요. 바로 히말라야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리는 갠지스강과 인더스 강입니다. 물론 몇몇 작은 강들도 있지요. 갠지스와 인더스 강은 흘러가면서 수십억 사람은 물론 수많은 초목과 동물들을 먹여 살립니다.

히말라야 빙하는 봄이 되면 녹기 시작해 꼭 필요한 때에 필요한 양만큼 물이 흐르게 합니다. 천지를 창조한 암소 아우둠라가 얼음을 핥아서 말이죠. 그런데 지금 아우둠라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히말라야 빙하는 시도 때도 없이 빠르게 녹아내리는 중이니까요. 빙하가 급격히 녹으면 필요하지 않은 때에 너무나 많은 양의 강물이 대홍수를 일으키며 흘러갈 겁니다. 물론 빙하가 다 녹고 나면 더는 흘러내릴 물이 없어 모든 생명이 타들어 갈 처절한 가뭄이 이어지겠지요.

다큐멘터리 <우리의 지구>는 우리가 살아가는 행성의 극치미를 보여주는 한편, 그 모든 아름다움이 곧 황폐한 죽음으로 바뀔 것이라는 경고를 아울러 보내줍니다. 해변에 머물 공간이 부족해 절벽으로 올라갔다가 맥없이 떨어져 죽은 바다코끼리의 영상과 가까운 미래 인간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지금처럼 온갖 자원을 고갈시키면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지금 지구의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는 마치 시한부 선고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기후 위기가 그 대표적인 선고입니다.

여기서 바가바드기타의 노래 구절을 두 개 가져와 보겠습니다.

 

오, 카운테야여. 감각이 대상에 닿으매 거기서 차가움과 뜨거움, 즐거움과 괴로움이 오고 가며 잠깐 머무느니라. 그것들을 참아 견디어라. 오, 바라타여.

 

오, 지극히 고상한 사람이여.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 어지럽거나 흔들리지 않는 어진 사람, 그 사람만이 영생불멸에 이를 수 있느니라. (2-14, 15)

어찌해야 ‘영생불멸’에 이를 수 있는지 크리슈나가 알려줍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우리 인간에겐 귀가 활짝 열리는 노랫소리입니다. 우리의 감각은 어떤 대상을 만나면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차가움도 느끼고 뜨거워지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괴롭기도 한 것이죠. 굳이 크리슈나의 노래가 아니라도 우리는 누구나 그걸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가진 감각들이 얼마나 대상에 따라 뒤흔들리는지 말이죠.

그런데 크리슈나는 이어서 노래합니다. 고상한 사람은 감각이 대상에 닿아도 어지럽거나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이죠. 이 고상한 사람이 곧 어진 사람이며 이런 사람이 영생불멸에 이른다는 것이죠. 큰일 났습니다. 나는 날마다 대상에 따라 내 감각이 흔들리니, 영생불멸은 꿈도 꾸지 말아야겠습니다.

다만 지구 생명체의 공멸이 예상되는 기후 위기를 벗어나려면, 우리는 이 노래를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감각에 흔들리지 않고 절제를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죠. 먹는 것, 입는 것, 보는 것, 듣는 것 등등 우리가 누려온 수많은 환락에서 적절한 통제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자기통제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공멸하지 않으려면 절제가 필요한 것은 인정하겠는데, 그 실천이 너무나 어려우니 그게 문제입니다. 간디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정신적 문제를 만날 때마다 자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그러고 나서 어떻게 할지를 결정한다면 그대들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것이라는 말에 마음이 조금 편안해 집니다. 물론 그 전제조건이 자기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긴 하지만 이 어려운 일도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에 대한 집착을 벗어버리기만 하면, 아무런 해도 입지 않는다니 용기가 생깁니다. 내 정신과 몸이 집착하고 있는 의식주나 명예, 권력, 자본 등에 대한 욕망을 한 번 내려놓아 보고 싶습니다.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면서 평화롭게 영생불멸한다니, 그 열매가 얼마나 달콤합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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