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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이번에도 ‘여주’만 빠졌다

기자수첩- 이번에도 ‘여주’만 빠졌다

  • 기자명 이장호 기자
  • 입력 2021.07.05 16:30
  • 수정 2021.07.06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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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기도 4개 목(牧) 중 여주만 복원에 ‘무심’
​​​​​​​광주와 양주 복원 완료, 파주는 복원추진위원회 출범

발행인 이장호시인_수필가(사)한국문인협회 회원(사)명성황후기념사업회 이사
발행인 이장호시인_수필가(사)한국문인협회 회원(사)명성황후기념사업회 이사

전국동주도시교류협의회라는 단체가 있다.

자치단체 명칭에 고을 주(州)자가 들어가는 대한민국의 14개 도시 시장들이 상호교류와 공동발전을 위해 2003년 설립한 단체다. 고을 주(州)자가 들어가는 대한민국 모든 도시가 가입한 것은 아니다. 광주광역시와 경기 남양주시는 가입하지 않았고, 경기도에서는 여주시와 광주시, 양주시, 파주시 등 4곳이 가입했다.

중국과 우리나라에 도시이름의 끝이 ‘천’이나 ‘주’인 도시가 유독 많다. 그 시초는 중국 춘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중국의 군현제(郡縣制)가 생각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진(秦)의 시황제(始皇帝)는 천하를 통일하자 모든 영토에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였다. 전국을 36개의 군(郡)으로 나누고, 그 아래에 현(縣)을 두었다. 그리고 군현(郡縣)의 관리를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여 전제적인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였다. 중국을 새롭게 통일한 수(隋)  문제(文帝)는 583년 군(郡)을 폐지하여 주(州)·현(縣)의 2급으로 개편했다.

우리나라에서 주의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 때는 신라의 탈해이사금 11년(67)이다. 그후 통일신라시대를 거치며 신라말 고려 초의 전란과정에서 궁예(弓裔)나 왕건(王建)은 그들에게 협조한 지방 세력의 출신지를 주(州)로 승격해 주면서, 고려 태조 대에만 50개가 넘는 주가 있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소규모 주의 ‘주(州)’의 명칭을 ‘산(山)·천(川)’으로 바꾸고 다시 군·현의 명칭을 부여하였다. (괴산, 제천 등이 생겨남)

왜 이리 장황하게 설명하는가 하면 우리 여주시의 명칭에 주(州)가 들어 있는 것이 허투른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여주(驪州)는 1469년(예종 1) 세종대왕의 영릉(英陵)이 천장(遷葬)되면서 목(牧)으로 승격되면서 여주(驪州)로 개명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목은 정3품관인 목사가 파견되고, 목에는 목사 이외 종6품관인 교수(敎授)가 파견되었고, 특별히 광주(廣州)·여주에는 종5품관인 판관(判官)이 더 파견되었다. 목이 설치된 곳은 경기도에 광주·여주·파주·양주, 충청도에 충주·청주·공주·홍주, 경상도에 상주·진주·성주, 전라도에 나주·제주·광주, 황해도에 황주·해주, 강원도에 원주, 평안도에 안주·정주·의주 등 모두 20개 지역이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목(牧))

많은 여주사람들이 가장 자랑으로 삼는 것은 여강(驪江)과 그 강가에 있던 청심루(淸心樓)다. 그리고 이제 그 자긍심에 하나를 더하면 여주목(驪州牧)이다. 여강은 아직도 도도히 흐르지만 그 강가에서 고려와 조선의 많은 시인문객의 사랑을 받은 청심루(淸心樓)와 청심루 서편에 있던 여주목(驪州牧) 관아는 이제 옛 지도와 기록물 속에서나 만날 수 있다.

지금도 여주사람들은 청심루에서 지어진 옛 시(詩)와 여강에서 만나던 여주팔경(驪州八景)을 자랑으로 생각하지만, 현재 유효한 것은 여강 뿐이다.

경기도의 4개 목(牧) 중 광주는 남한산성 행궁복원 때 관아가 복원됐고, 양주시는 조선 중기인 중종 1년(1506년)에 설치된 양주목 관아에 대해 2000년부터 2017년까지 5차례 발굴조사를 벌여 건물지 등을 확인하고 관아 복원과 문화재보호구역 정비사업을 벌여 2018년 4월 복원한 후 일반에게 공개했다.

파주시는 지난 2019년 7월 세조 5년(1459) 목으로 승격한 조선시대 파주시의 행정치소였던 파주목 관아지 복원을 위한 ‘파주목 복원추진위원회’를 발대시켰다.

파주시는 파주목의 역사와 전통을 찾기 위해 2015년부터 파주목 관아지 문화재 지표조사를 시작으로 파주목 관아지 복원정비계획을 수립했다.

조선시대 경기도의 4개 목이 있던 도시 중 여주시만 여주목 관아지 복원에 무심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주의 역사적 상징을 회복하고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라도 여주목 관아와 청심루 복원에 대한 여주사람들의 관심이 절실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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