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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골목길 3...서울 남산①

대중가요의 골목길 3...서울 남산①

  • 기자명 조용연 여행작가
  • 입력 2020.09.21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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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가객 배호, 그의 노래와 남산을 한 바퀴

배호의 열성 팬들은 그의 생일이 들어 있는 4월에 술렁인다. 스물세 번째 ‘배호가요제’는 그가 짧은 생을 거의 보낸 서울, 장충단 공원에서 열렸다. 29살 봄꽃 같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한 가수의 노래가 50여 년이 넘도록 대중의 노래로 애창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가난과 병마, 그 신고(辛苦)의 세월에 기대어 부른 절절한 노래에는 모창으로는 복사할 수 없는 눈물의 비표(秘標)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내게 배호의 노래는 흘러간 노래의 절반 이상이다. 애국가속 남산, 목멱대왕(木覓大王) 남산을 한 바퀴 돌며 배호의 노래를 따라가 보는 길은 그를 추억하는 나만의 트레일이다. 중절모를 눌러쓴, 건방지게 멋진 배호는 여전히 팬들의 가슴에 살아있다.

남산 한옥촌에서 출발하는 남산 한 바퀴

충무로역에 내리자 별들이 반겨준다. 흘러간 스타에서부터 요즘 대세를 이루는 청춘스타까지 포스터 속 얼굴들은 낯익다. 대종상의 화려한 역사는 여느 곳과는 다른 이 지하철역의 여백에 자리 잡고 있다. 벚꽃이 지고 나면 신록이 시작된다. 배호의 노래 따라 남산을 한 바퀴 도는 출발은 ‘남산 한옥촌’이 제격이다. 아랫단 충무로에서 남산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어서다. 가는 봄을 못 이긴 여인들이 동창회의 이름으로 모이고, 외국인들은 반짝이로 변질된 한복을 입고 찍은 인증사진을 자랑하는 필수코스가 되었다.

대한극장 앞 퇴계로는 여전하다. 70mm 상영관으로 격조를 자랑하던 대한극장은 다시 지어 싱싱하고, 맞은편 진양상가는 50년 전 허우대 그대로 늙었어도 건재하다. 애완견들이 창밖으로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하던 거리는 사라졌으나, 수입상들이 오토바이를 길에 줄 세워 유혹하던 퇴계로는 한 블록 건너에 여전히 성업 중이다. 서울의 3대 냉면집에 드는 평양면옥과 장충동 족발촌이 이름을 날리는 거리가 끝나는 어간에 추억의 과자집 태극당이 있다. 그 길 건너편이 장충단 공원이다. 

대한민국 근·현대사가 지나간 골짜기 <안개 낀 장충단 공원>

평일의 장충단 공원은 한가한 숲이다. 남산의 동쪽 종남산(終南山)이 남소문동천(南小門洞川) 골짜기로 흘러내리다 첫 번째로 평평한 곳이 장충단 자리다. 장충단은 우리 근대사의 기울어가는 왕조의 끝에 만들어진 슬픈 징표다. 명성황후가 일인 자객에게 시해당한 을미사변(1895, 고종35년)때, 최후를 함께한 궁내부대신 이경직과 연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장졸의 영혼을 배향한 장소다. 털보 홍계훈은 연전에 화제를 모은 드라마 <선샤인>에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골짜기의 역사와 비극은 서로 얽혀져서 시대에 따라 색깔을 달리해 왔다. 반공의 이데올로기는 타워호텔에서부터 자유센터로 이어지고, 전통의 이데올로기는 국립극장에서부터 흘러내리면서 ‘3.1 독립운동기념탑’과 ‘유관순 동상’으로 이어진다. 일제의 ‘장충 흔적 지우기’는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또오히로부미(伊藤博文)를 기리기 위해 박문사를 세우며 절정을 이룬다. 그 터에 영빈관과 신라호텔이 들어서 마침표를 찍는다.

가난하던 시절 만들어진 장충실내체육관은 김기수의 통쾌한 복싱 타이틀매치와 박치기왕 김일이 안토니오 이노키를 때려눕히던 순간 함성으로 떠나갈 듯했다. 황소가 등장하는 천하장사 씨름대회는 물론,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뽑는 체육관 대통령의 원적지이기도 했다. 수십만 시민을 불러 모은 박정희와 김대중의 1971년 ‘장충단 유세’ 대결에는 나무 위에까지 청중들이 올라가 박수를 쳤다. 지금 장충단은 벼랑으로 가는 정치와 안개 자욱한 이 나라의 운명을 말 없는 고목처럼 지켜보고 있다.

노래로 돌아가자. 장충단을 널리 알린 공로로 말하면 배호 만한 이가 없다. 안개로 수식한 장충단은 떠나간 여인을 못 잊는 추억의 노래로 깊이 새겨져 있다. <돌아가는 삼각지>로 히트한 지 몇 달 뒤에 나온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은 그 노래가 그 노래 같다는 전문가의 평에도 불구하고 연속 홈런을 친다.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누구를 찾아왔나/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 지난날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 다시 한번 어루만지며 떠나가는 장충단 공원 // 비탈길 산길을 따라 거닐던 산기슭에/ 수많은 사연에 가슴을 움켜쥐고 울고만 있을까/ 가버린 그 사람이 남긴 발자취 낙엽만 쌓여 있는데/ 외로움을 달래가면서 돌아서는 장충단 공원 <안개 낀 장충단공원>, 최치수 작사, 배상태 작곡, 배 호 노래, 아세아레코드, 1967

장유정 교수의 말대로 ‘지하 8층까지 내려간다는 공포의 저음’과 바닥까지 끌고 가서 밀어 올리는 절절함이 배어 나온다. 몇 번을 들어봐도 배호는 ‘장춘단’이란 발음으로 노래를 마무리한다. 

유제하의 ‘가리워진 길’ 에 등장하는 안개는 어떡하든 헤쳐 나아가야 하는 진행 방향의 안개이나 배호의 ‘장충단 공원에 낀 안개’는 골짜기에 자욱하게 머물러 있는 안개다. 유제하의 안개는 보일 듯 말 듯 하나 그래도 가야 하는 몽롱한 불안이지만 배호의 안개는 쓰라린 이별과 연인과 함께 새긴 그 이름을 추억하는 몽환의 스모그(smog)다.

한강에서도 제대로 조망할 수 없는 남산, 그 상처

언덕길을 오르면 ‘남산 제2호터널’이다. ‘유관순 동상’과 ‘3.1독립운동 기념탑’이 바라보이는 곳이다. 유사시 방공호 용도로 만들어진 터널은 장충단과 이태원을 연결하지만 낡고 비좁아 보인다. 자유센터의 숙박동으로 지어졌다가 타워호텔이 된 건물은 자전거로 오르기에는 조금 버거운 정상에서 맞아준다. 한때 타워호텔 나이트클럽은 청춘들의 밤을 위한 선망의 장소였다. 이젠 휴양형리조텔 ‘반얀트리 클럽& 스파 서울’로 다시 태어났지만 누구나 접근하기에는 역시 힘든 언덕에 있다. 남산을 감싸 안고 돌아가는 길에는 남산맨션이 낡았어도 그 뛰어난 입지 덕에 명품 아파트로 남았다. 좀 더 위쪽에 있던 ‘남산외인아파트’는 1972년 외국인들에게 보이기 위해 지은 아파트였다. 1994년 ‘서울정도 600주년 기념, 남산 제모습찾기’의 한 부분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며 무너뜨려 공원이 되었다. 

대중가요에 등장하는 남산공원이 회현동에서 올라 케이블카를 타고, 팔각정까지 올라가는 코스였다면 한적하게 숲을 즐길 수 있는 길은 힐튼에서 하이얏트에 이르는 소월길 위쪽으로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초고층 건물이 들어서면서 남산을 제대로 조망하는 일은 이제 멀리서도 쉽지 않다. 진작부터 한남동 북단 남산 허리를 잘라 들어선 그랜드 하얏트 호텔은 창밖으로 내려다보는 조망만으로도 단연 서울 최고다. 어벙하던 시절에 선점의 의미를 되새김해 준다. 삼각지로 가기 위해 경리단길로 내려간다. 소위 몇 년 전만 해도 청춘들로 북적이던 ‘뜨는 길’이 이젠 ‘가라앉는 길’로 보인다. 이 내리막처럼 ‘임대중’이란 삐뚤빼뚤한 글씨가 서글픈 ‘젠트리피케이션’의 무대임을 보여준다. 녹사평에서 삼각지로 가는 길은 양쪽으로 미군 담벼락의 호위를 받는다. 미8군사령부가 평택으로 떠나고 나서도 ‘한미연합사’가 잔류하고 있으니 청나라 군대에서 일본군대까지 병영의 흔적을 지우기란 애초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4강의 간섭과 분단의 비극 속에서 의지와 조력의 상관관계 아래 살아갈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에게 이 정도의 땅은 어쩌면 오래도록 조차지(租借地)로 남겨두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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