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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골목길 (목포2)·①

대중가요의 골목길 (목포2)·①

  • 기자명 조용연 여행작가
  • 입력 2020.08.31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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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수의 남쪽 항구, 예향 넘치는 목포

이 봄 목포에 서성인다. 목포의 봄꽃이 여느 남쪽 항구보다 각별히 아름답지 않아도 애수가 넘치는 골목만으로도 따뜻하다. 본격적 유행가의 시발이라는 <사의 찬미>는 윤심덕과 현해탄 정사 스캔들에 가려진 목포사람 김우진의 걸작이다. 트로트 음악 절정의 70년대를 구가한 핸섬보이 남진과 이미자에 필적하는 매혹의 조미미도 목포가 생장 무대이자 ‘떠나가는 연락선’의 노래배경이다. 극작가 차범석, 춤의 명인 이매방, 소설가 박화성이 유달산 정기를 빌어 태어났다. 서정시인 노향림이 가곡의 무대에 올린 <압해도> 또한 따뜻한 목포가 안고 있는 검푸른 섬을 향한 찬사다.

우리 가요 최초의 힛트 곡 <사의 찬미>, 김우진 거리

노적봉 언저리에서 하룻저녁을 보내고 김우진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눈여겨 바라보지 않은 이에게 김우진은 낯선 이름이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를 이야기하면 ‘아, 그 노래’ 할 것이다. 그 노랫말을 쓴 사람이 김우진이다. 윤심덕과 정사 스캔들에 가려진 김우진의 흔적은 유달산 자락 옥단이 길에 ‘김우진거리’로 복원되어 있다. 양동성당 하얀 건물이 서 있는 언덕이 목포의 근대사 속에서 더 환하게 빛나는 것은 극작가 김우진이 있어서다. 장성 출신의 목포 부자 김성규는 망해가는 조선의 장성군수까지 지냈지만 이미 새로운 시대에 눈을 뜨고 있었다. 그의 세 아들 중 장남이 김우진이다. 차남 김철진은 공산당 청년연맹까지 가담했으나 전남 도의원까지 지냈고, 삼남 김익진은 언어학자였다. 이들은 이른바 ‘목포 모던보이 1세대 3형제’다.

<사의 찬미>는 당시로써는 10만 장이라는 어마어마한 레코드 판매량을 기록한 우리 가요사 최초의 히트곡이다. 음악평론가 이영미는 “윤심덕이 성악가라는 칭호가 무색하게 부른 찬송가 수준의 노래”라고 혹평하지만 ‘현해탄의 정사’라는 사연 있는 노래로 식민 조선을 뒤집어 놓았다.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려 왔느냐/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평생/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녹수 청산은 변함이 없건만/ 우리 인생은 나날이 변했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평생/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사의 찬미>, 김우진 작사, 외국곡, 윤심덕 노래, 1926

 

평양 출신인 윤심덕은 기독교 권사 부부의 딸로 도쿄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성악가다.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 같은 ‘신여성 3인방’과 같은 반열이다. 원래 홍난파의 애인이었다는 설도 있으나 생활고에 힘들어 소위 스폰서를 만난 일로 지탄받아 만주로 도피했다가 1925년 귀국한 후, ‘토월회’ 배우가 된다. <사의 찬미>는 취입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윤심덕이 귀국선에 오르면서 히트될 운명적 상황이 설정된다. 1926년 8월 3일 관부연락선을 탄 그 이튿날 현해탄에서 둘은 실종된다. ‘정사의 투신’이라고 언론은 대서특필했으나 김우진이 윤심덕을 사랑했다는 물증은 없다. 유서도 없다. 단지 김수산(水山)과 윤수선(水仙)이란 가명의 탑승기록부만 남기고 함께 물로 사라졌으니 ‘돌림자’가 심증의 근거다. 영원한 사랑을 향한 자살설과 조선에 레코드를 팔기 위한 기획 살인이라는 타살설까지 난무했다. 심지어 자살을 가장해 유부남인 김우진과 처녀 윤심덕이 ‘이태리인지 다른 나라 어딘가에 잘살고 있다더라’는 설까지도 떠돌았다. 그들이 사라지고 난 후 발매된 <사의 찬미>는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다뷰브강의 잔물결>에 실려 전설의 노래가 되었다. 

내 기억 속에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두꺼운 뿔테 안경의 극작가 이서구 선생이 윤심덕을 기억하는 이야기는 의미심장하다.

선물로 뭘 사다드릴까요?(윤)/ 취입하고 돌아올 때 넥타이나 하나 사 와요.(이)/ 죽어도 사와요?(윤)/ 죽으려거든 넥타이나 사서 부치고 죽어요(이)

윤심덕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서 도착한 넥타이를 이서구는 평생 간직했다고 한다. <사의 찬미>의 테마는 너무나 강렬해서 신성일, 문희 주연의<윤심덕>(안현철 감독, 1969), 임성민, 장미희 주연의 <사의 찬미>(김호선 감독, 1991)에서부터 연극(1998), 가수 바다의 뮤지컬(2005), SBS 드라마(2018)까지 같은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의 엘비스프레스리, 남진의 목포

목원동 언덕에서 내려오다 북교초등학교 앞을 지난다. 교문보다 덩치가 큰 비석이 길손을 붙잡는다. 이 학교 30회 졸업생 ‘고 김대중대통령’의 기념비다. 1907년 개교했으니 110년을 훌쩍 넘어선 학교다. 극작가 김우진, 가수 이난영, 극작가 차범석, 가수 남진도 모두 이 학교 출신이니 그 오랜 역사에 걸맞게 자랑할 만하다. 

남진 생가

목포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남진의 생가가 있다. 목포시는 이 집을 예향 목포 탐방의 코스로 소개하고 있다. 목포세무서 뒤편에 있는 남진의 옛집은 그야말로 부잣집 포스가 남아 있다.    남진이 나이롱 양말이 해지도록 트위스트를 추면서 놀았다는 2층 집은 굳게 잠겨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와서 문을 열어 달라고 귀찮게 했으면 “지금 이 집엔 남진이 살지 않습니다. 남진의 기념관이 아니니 볼 것도 없고, 그저 관리하는 늙은이 한 사람 살고 있으니 양해하시기 바랍니다.”라며 쓸쓸한 안내를 하고 있겠는가.

남진이 어떤 사람인가. 1970년대를 풍미하면서 오늘날까지 서민 대중과 함께 지내온 영원한 오빠, 우리나라 ‘오빠부대’를 거느린 원조가 아니던가. 남진은 호남매일신문 사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부친을 둔 요즘 말로 금수저다. 압해도 톱머리로 놀러 다니던 ‘김남진’은 그 잘생긴 얼굴과 가수가 될 끼를 숨기지 못하고, 어머니가 밀어주는 힘을 업고 상경해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한다. 19살 때 일이다. 1965년, 그 스스로가 꼽은 인생의 노래 세 곡에 들어있는 <울려고 내가 왔나>가 크게 히트한다.

울려고 내가 왔나 누굴 찾아 여기 왔나/ 낯 설은 타향 땅에 내가 왜 왔나/ 하늘마저 날 울려 궂은 비는 나리고/ 무정할 사 옛사람아 그대 찾아 천리길을/ 울려고 내가 왔나
그 누구 찾어 왔나 영산강아 말해 다오/ 반겨줄 그 사람은 마음이 변해/ 아쉬웠던 내 사랑 찬 서리에 시드나/ 그렇지만 믿고 싶어 보고프면 또 오리라/ 울면서 찾아오리 <울려고 내가 왔나>, 김중순 작사, 김영광 작곡, 남진 노래, 1966, 오아시스 레코드

먹고 살길 찾아 서울로, 도시로 올라온 사람들은 이미 ‘낯 설은 타향 땅에 내가 왜 왔나’에서 눈물보가 터지기 시작한다. 레코드 발매 보름만에 7,000장이 팔려나가는 기세는 공감 자체였다. 첫 히트작이 된 이 노래는 ‘신필림’에 의해 영화화되어 그는 주연으로 발탁된다. 프랑크 시나트라 처럼 “영화배우로 성공하려면 우선 가수로 데뷔해야겠다”는 그의 결심이 맞아떨어졌다. 연이어 불후의 명곡 <가슴 아프게>도 히트한다. 사실 바다와 이별이 주제인 <가슴 아프게>는 목포항이 제격이지만 작사가가 그 노래를 만든 배경이 ‘인천의 바다’라고 밝히고 있기에 나중에 다시 조명하기로 한다.

남진은 70년대 극장 쇼 무대의 마지막 전성기를 누린다. 남진과 나훈아의 대비는 그 시대 가요계 쌍두마차에 대한 당연한 비교였다. 나훈아의 <고향역>을 만든 작곡가 임종수는 “두 사람은 곡을 대하는 감정에서도 달랐다. 남진은 부드럽고도 기교 있는 목소리였고, 나훈아는 깊게 토해내는 진득한 맛이 있다”고 평했다. ‘남진이 좋으냐 나훈아가 좋으냐’의 선택지를 두고 무대 아래에서도 호불호는 갈려서 대결은 치열했다. 팬심의 과열이 때로 폭력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현실을 위로해 주는 남진 오빠를 향한 처녀들의 황홀한 몰입은 원조 ‘오빠부대’에 자원입대하게 만들었다. 이제 그 열정의 처녀들도 조국 근대화의 고달픈 시간을 건너서 손주를 돌보며 어깨에 파스를 붙이고 떼는 할머니가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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