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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여담- ‘고마움’을 못 가르친 죄

여강여담- ‘고마움’을 못 가르친 죄

  • 기자명 조용연 주필
  • 입력 2020.05.1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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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이라는 세대에게 ‘고마움’ 못 알려준 건 기성세대의 잘못

젊은 탈북민의 수다 영상에는 자유와 현실에 대한 감사가 넘쳐

조용연 주필

요즈음 젊은 탈북 여성들이 찍은 유튜브 ‘수다’ 동영상에 푹 빠져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내가 목숨을 걸고 탈북하길 잘 했다”는 데 공감하며 솔직한 이야기를 끝없이 털어놓는다. 주제는 영화보다 더 절박한 탈북의 대장정 순간순간을 말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의 삶을 감격스럽게 말한다. 북에 있는 가족에게는 미안하지만 “다시 그런 상황이 와도 나는 탈북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잘라 말한다.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전기밥솥이 소리를 내며 이밥을 해주는 일상을 북에서 아침부터 물을 길어오고 땔감을 아궁이에 때면서 밥하는 장면과 대비시킨다. 서른이 된 여성이 북한에서라면 꿈도 꾸지 못하는 대학생이 되어 2000년생 동기생들과 공부하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지 함박웃음을 짓는다. 무슨 옷이든 자유롭게 골라 입고 외출하는 시간을 규찰대가 치마 길이를 재고, ‘길면 길다, 짧으면 짧다’고 트집 잡는 북녘의 세상과 대비하며 깔깔거린다. 자신이 번 돈으로 해외여행을 가려고 처음 여권을 발급받아 든 기쁨, 외국공항 검색대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초록빛 여권을 자랑하며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고 소리치고 싶었다고 실토한다. ‘대한민국’을 또박또박 말하는 싱그러운 청춘들의 감사가 자유가 박탈된 북한 사회에서의 경험과 대비되어 더 울림이 크다.

‘고마움’을 못 배우고 자란 세대가 만난 고난, ‘헬조선’

경기가 나빠지고, 취업이 어려워지고, 세상이 어수선해지는 과정에서 젊은이들은 비명을 지른다. ’헬조선‘이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우리 사회를 어두운 눈으로만 조명한다.

‘고속성장 시대’가 그늘이 어찌 없겠는가? 세상 어느 일이 햇볕 따스하고, 투명한 균질의 완제품처럼 존재한단 말인가. 취업이 안 되다 보니, 청춘이 고시원 골방에서 늙어가는 서글픈 군상을 만들고 그 누적된 숫자가 사회문제화된 지 오래다. 모두 눈높이는 대기업의 잘나가는 소수의 ’선택된 인재‘ 수준에 고정되었고, 어렵고 힘든 일에 몸을 던져 일하려 하지 않는다. 생산 일선에서는 “사람이 없다”고 아우성인데, “그런 데 가느니 노는 게 낫다”는 상황 속에 기생하는 것이 청년수당이고 실직수당(물론 진짜 필요한 사람도 있다)이다. 누가 경쟁력도 없는 대학을 ’배워야 한다‘는 명분으로 선심 쓰듯 경향 각지에 만들었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업교육을 받으면 충분히 소화할 산업전선 소요인력을 전부 대학생을 만들어 눈높이를 실력 이상으로 고정시킨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정치권발 무책임한 시혜의 산물이 지방대의 ‘학생 부족’과 맞물린다. 그런 상황에서 보면, 한국은 ‘헬조선’이 분명하다. 그러나 젊은 세대가 외면하고 있는 것이 ‘자유와 민주’, ‘자본과 시장’의 경쟁 원리다. 스스로 청춘이라고 말하는 세대들이 태어날 때 이미 그런 세계는 주어진 조건이었다. 공기처럼 우리 곁에 당연히 존재하는 것들이라고 여겼으니 ‘고마움’을 인식할 비교기준이 없었다. ‘보릿고개’ ‘퇴비증산’ ‘골목청소’ 뭐 그런 것은 할아버지 때 고리타분한 이야기쯤으로 여겼다. 태어나 보니 우유는 냉장고에 당연히 넘쳐났고, 밥투정을 하면 엄마가 밥그릇을 들고 따라 다니며 먹이는 시대에 자라났다.

진짜 지옥에 가봐야 알겠나 ‘헬조선’

얼마 전 한 칼럼이 오스카 루이스의 ‘빈곤문화(culture of poverty)’를 이야기하면서 예로 든 우리 사회의 현상은 어두운 먹구름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야 무섭다 해도 끝이 보이는 전쟁이지만 이 부정의 항목은 어찌 치유해야 할지 소름 끼친다. △‘내 탓보다 남 탓’은 자기의 과오를 철저하게 은폐한다, ‘책임불명’이다. △‘부자에 대한 적대감’은 곧 부자를 고립시켜 내가 빈곤해진다 △‘자립보다 의타주의’는 구시대 산물로 폄하한 ‘4H와 새마을 정신’의 매장에서 비롯되었다. △‘요행 심리와 공짜 심보’는 한탕주의의 유혹과 로또 가게에 늘어선 줄이 입증한다. △‘경쟁 기피’라는 패배주의는 자사고를 없애려는 하향식 평준화에서 극에 달한다. 하물며 잡초도 경쟁하며 자란다. △‘피해의식’은 콤플렉스의 다른 이름이다. 세상을, 국제사회를 비틀린 눈으로만 본다. ‘한 방에 훅 간다’는 유행가도 피해의식과 자조의 탄식이다 △‘밥그릇 싸움’은 밥을 만들어 낼 생각은 안 하고, 있는 것 곶감 빼먹기에 ‘성 대결’ ‘세대대결’까지 가세한 ‘진흙탕 싸움’이다. △‘미래지향적 사고 결여’는 결국 ‘오늘 하루 즐겁자’에서 맴돈다. 반일감정에 재미를 본 ‘일본 극혐오’도 바탕에는 자존감 콤플렉스가 깔려있다. 누가 이들을 만들었나. 누구 탓을 하겠는가. 그들은 우리의 아들·딸이다. ‘고마움을 못 가르친’ 기성세대의 자 잘못이 가장 크다. ‘탈북젊은이’들이 감사함을 가슴 절절하게 말하는 동영상을 우리 모두 가 보고 뼈아프게 느껴야 한다. 고마움의 교육에서 출발하여, 잘못된 시대의 그늘을 걷어내는 교육을 하여야 우리에게 그나마 희망이 있다. ‘고마움’을 모르는 세대에게 주는 지원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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