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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61. 겸손한 기생충
장주식 작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92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각본, 작품, 감독, 국제장편영화상 등 4관왕이 되었습니다. ‘이제 봉준호가 장르가 되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는 영화감독으로서 이룬 성과가 얼마다 대단한 것인지 알려줍니다.

반지하에 사는 가난한 일가족이 고급주택에 사는 부잣집에 일하러 들어갑니다. 아들딸은 과외선생, 남편은 운전기사, 아내는 가정부로 들어갑니다. 일가족이 부잣집에 들어가는 방식은 일종의 사기에 해당하며, 같은 계층의 사람들을 내쫓고 대신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마치 기생충이 숙주에 달라붙는 것과 같음을 은유합니다.

영화 후반부에 기생충들끼리 서로 죽입니다. 내쫓긴 기생충 동료가 복수를 하고 공격당한 기생충 동료가 다시 되갚아 주는 것이죠. 그 과정에서 숙주(부자)도 살해를 당하게 됩니다. 숙주를 죽인 기생충은 지하 깊숙한 곳에 숨어들어 새로운 숙주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립니다. 지하에 은신한 기생충의 아들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돈을 벌어 그 집을 사겠어요. 그럼 아버지는 그냥 계단으로 올라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마침내 기생충이 당당하게 숙주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선언 같은 것이죠.

 

그런데 영화 <기생충>은 호불호가 엇갈립니다. 이런 비판이 있습니다.

“소득 불평등에 따른 사회문제를 이런 식으로 소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부자는 다 착해.’라는 대사는 너무 가볍지 않나?”

그러자 영화에 환호하는 사람이 말합니다.

“대중의 시각을 잘 반영했다고 보는데? 실제로 그렇지 않나? 부자들이 더 순수하잖아. 가난한 사람들을 기생충으로 은유한 것은 참 절묘해.”

“무슨 소리. 내가 보기엔 부자들이 더 기생충이야. 자신의 부를 늘리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고 인류의 도덕성까지도 파괴하는 자들이니까. 그런데도 좁은 시각으로 빈자를 기생충으로 보는 것은 기만이야.”

“그렇게만 볼 건 아니지. 자기 자식밖에 모르는 부자의 탐욕도 적절하게 그려졌잖아. 게다가 냄새로 끊임없이 신분을 구분하는 건 절실한 바가 있어. 가난한 자에 대한 냄새 혐오는 결국 살인까지 부르게 되잖아. 뛰어난 작품성을 갖고 있다고 보는데?”

두 사람 대화를 듣고 있던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오스카상을 수상했다고 법석을 떠는 건 문제야. 마치 예전에 조선 선비들이 ‘작은 중국’이랍시고 자부하던 소중화(小中華) 사대주의와 다를 바 없어. 내가 보기엔 아카데미에서 아시아인에게 상을 준다고 우쭐거리는 것도 일종의 위선이야. 백인들 잔치라는 비판을 면하기 위한 꼼수 같은.”

“허허 참. 기생충 영화는 미국 아카데미에서만 상 받은 게 아니잖아. 유럽에서도 많이 받았어. 영화제 심사위원들을 모독하면 안 되지. 인종 문제가 아니라 예술성에 대한 칭찬으로 봐야 해. 오히려 사대주의 운운하는 그대의 시각이 더 사대주의 같은걸.”

그러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한 사람이 말합니다.

“나는 영화 기생충에서 현대적인 힘의 작동방식을 봤네. 기생충으로 은유 된 빈자들은 부자의 힘을 실체가 있다고 인정은 하지. 하지만 그 힘을 기생충 본인들에게 맞게 작동시키려는 방식을 찾잖아. 과외선생으로, 운전기사로, 가정부로 들어가거나 지하 깊숙한 곳에 숨어있거나 하는 방식 등으로 말이야. 나는 이것을 철학자 니체 식으로 본다면 ‘생명력’ 또는 ‘권력에 의지’라고 할 수 있겠어.”

“어렵군. 좀 더 쉽게 설명해 보게.”

“뭐랄까. 단순한 인과관계로 힘과 권력의 위계질서를 그리지 않는다는 거지. 영화에 등장하는 부자가 가난한 가족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그려지지 않는 것처럼. 다양한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행위자들이 원인과 결과에 따른 책임을 공유해야 한다고 영화는 얘기하는 것 같아.”

“……그 참. 쉽게 얘기하라니까 더 어렵게 만드네.”

 

사람들 논란은 여기까지만 듣죠. 다만 노자를 빌어와 겸소(兼小)를 덧붙여 두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크고 중요한 것은 마땅히 낮춰야 함이다!”

가진 것의 ‘크고 작고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겸손함, 그것이 겸소의 참뜻입니다. 봉준호 감독은 시상식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입니다.”

평소 존경했다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말을 인용한 것이죠. 스스로 성취를 으스대는 모습이 전혀 아닙니다. 감독상 경쟁자인 상대 예술가에게 자신을 낮추고 말을 듣는 사람들에겐 감동까지 선사하는 그런 자세. 이 말은 울림이 커서 이젠 봉준호의 말로 세상에 회자 됩니다.

결국 한 시대를 격동시킨 예술을 선보였을 때, 그 작가가 얼마만큼 겸손한가가 중요한 예라고나 할까요. 스스로 낮추는 겸손은 오히려 자신이 욕망하는 바를 얻게 하는 힘도 있으니까요.

 

<노자 도덕경 61장 : 大國者下流(대국자하류)하니 天下之交(천하지교)이며 天下之牝(천하지빈)이라. 牝常以靜勝牡(빈상이정승모)는 以靜爲下(이정위하)이기 때문이다. 故大國以下小國(고대국이하소국)이면 則取小國(즉취소국)하고 小國以下大國(소국이하대국)이면 則取大國(즉취대국)하나니라. 故或下以取(고혹하이취)하고 或下而取(혹하이취)하나니 大國不過欲兼畜人(대국불과욕겸축인)이요 小國不過欲入事人(소국불과욕입사인)이라. 夫兩者各得其所欲(부양자각득기소욕)이지만 大者宜爲下(대자의위하)이니라.>

 

큰 나라는 큰 강이나 바다처럼 하류와 같으니 세상이 만나는 곳이요 천하의 암컷이 된다. 암컷이 늘 고요함으로써 수컷을 이기는데, 고요함이란 낮춤을 말한다. 그러므로 큰 나라는 작은 나라에게 겸손하여 작은 나라를 얻게 되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에게 스스로 낮추어 큰 나라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겸손하여 얻기도 하고 스스로 낮춰서 얻기도 하는데, 큰 나라는 타자를 포용하여 기르고자 함일 뿐이고 작은 나라는 타자의 품으로 들어가 섬기고자 할 뿐이다. 어느 쪽이든 각각 자기가 원하는 바를 얻게 되지만, 무엇보다 크고 중요한 것은 마땅히 낮춰야 함이다. 

장주식 작가  yeoju5@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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