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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지는 교회(敎會)가 아니다! 교회(敎會)는 개혁하라!
  • 이동순 목사 /천송교회,여주환경운동연합 상임&
  • 승인 2020.03.09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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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목사 /천송교회,여주환경운동연합 상임대표

요즘 세계는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불안에 떨고 있다. 한국은 이제 그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정부(政府)는 이제야 신천지의 전체 교인 명단을 확보하고 조사에 들어갔고 이만희 총회장은 국민들에게 큰 절을 두 번이나 하며 진심이 결여된 사과(謝過)를 했다. 아쉬운 것은 초기에 명단을 입수하여 발 빠르게 대처했다면 빠른 확산을 막았을 것이다. 하지만 기성교회에 잠입하여 지하활동으로 교인들을 포섭(包攝)하는 것이 신천지의 전도 전략이기에 전체 교인 명단이 공개되어 만인에게 알려지면 큰 치명타를 입게 되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 불을 보듯 뻔했을 것이다. 결국 이렇게 감당하기 어려운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신천지는 교회(敎會)라고 할 수 없는 사교(邪敎) 집단이다. 종교에 자유가 있지만 상식에 어긋나고 사회에 혼란과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준다면 종교라고 할 수 없다. 더구나 신(神)이나 성인(聖人)이 아니라 지탄받는 한 사람이라면 더 더욱 아니다. 신천지 교리도 성경의 요한계시록을 중심으로 하는 신비한 내용들을 교주(敎主) 이만희 입맛에 맞게 해석함으로 교리적으로 오류가 많다.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았기에 그의 가르침은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전형적인 이단(異端), 사교(邪敎)의 단골 수법이다.

사교(邪敎)란 그릇된 교리로 사회에 해(害)를 끼치는 종교란 뜻이다. 어느 종교나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포교(전도)를 한다. 그런데 신천지는 그렇지 않다. 몰래 기성교회에 잠입하여 목사와 교인들을 이간(離間)시켜 빼가는 추수꾼의 사명과 작은 교회를 분열시켜 목사를 몰아내고 통째로 접수하는 소위 ‘산 옮기기’를 하기도 한다. 가정보다는 신천지 모임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도록 강요하며 심지어는 가족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하고 협박과 으름장을 놓는 탓에 탈퇴하기도 매우 힘들다고 탈출자들은 말한다.

신천지가 지난해 중국 우한에 교회를 설립한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중국 우한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발원지로 지목된 곳이다. 올해 2월 21일 신천지 홈페이지에 따르면, 신천지는 지난 2019년 중국 우한에 교회를 설립했다. 홈페이지에 나오는 교회 연혁에는 "지난해 10개월 만에 10만 3746명이 수료했다"며 "해외 워싱턴 DC 교회와 우간다 교회, 중국 내 몽고교회, 우한교회, 영국교회를 설립했다"고 나온다. 현재 홈페이지에 '우한에 교회를 설립했다'는 내용은 삭제된 상태다. 신천지가 지난해 우한 지역에 교회를 설립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되자, 이를 부인하다가 슬그머니 관련 사실을 지운 것이다. 사기(詐欺)를 치는 곳은 교회(敎會)가 아니다.

현 정부(政府)는 대구 신천지의 모임을 계기로 사찰의 예불, 성당의 미사, 교회의 예배를 자제해줄 것을 권고했다. 기독교를 박해하던 일제 강점기에도, 한국 전쟁 중에도 종교 행사는 멈추지 않았다. 특히 교회는 주일예배를 생명줄 같이 붙잡고 있다. 이런 상황에 한국 교회의 70%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실제로 드리고 있다. 비기독교인들은 목소리를 높여 사찰(寺刹)과 성당(聖堂)을 칭찬하면서 교회(敎會)를 성토(聲討)하고 있다. 그들은 한국의 교회는 늘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라고 비난한다. 왜 교회는 점점 더 사회와 멀어지는가? 이제 다시 개신교의 종교개혁이 절실한 때이다. 필자는 특히 예배와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대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성경(聖經)이 말하기를 ‘예배는 우리가 삶으로 드려야 한다’라고 가르친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웃의 기쁨에 함께하고 이웃의 고통에 함께하고, 그들을 섬겨주는 것도 예배이며, 제도적(制度的) 예배보다 이런 삶 속의 예배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예수께서 어떤 예배를 더 선호하시고 행하셨는가를 성경을 통해 살펴보면 알 일이다. 이것이 교회가 새롭게 개혁할 진정한 예배이다.  

두 번째로 성경을 오로지 문자(文字)적으로만 이해하려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요즘 기독교에서는 문자주의를 넘어서서 성경을 깊이 읽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들은 수천 년 전에 성경에 기록된 율법과 그들이 행했던 생소한 유대문화의 의식(儀式) 등 외부적인 것들은 결국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기독교 초기부터 지금까지 성경을 읽을 때 문자를 넘어서서 더 깊은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4세기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公認)하면서 문자주의를 넘어서려는 모든 시도를 억눌렀다. 그 이후 1600년 동안 그리스도교에서는 문자적 성경 읽기가 교회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것은 큰 비극(悲劇)이다. 초보적 단계를 벗어나는 깊은 신앙(信仰)이란 문자주의를 극복하고 초월함으로써 가능하다.

예를 들면 크리스마스와 산타크로스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어릴 때는 내가 착한 어린이가 되면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타 할아버지가 와서 양말에 선물을 잔뜩 집어넣고 간다는 것을 문자(文字) 그대로 믿는다. 산타 이야기는 나에게 기쁨과 희망이다. 일 년 내내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위해 착한 아이가 되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울면 안 된다.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주시지 않는다는 노래를 들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어느 날 아빠, 엄마가 양말에 선물을 넣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 크리스마스는 가족들끼리 서로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구나. 나도 엄마 아빠, 동생에게 선물을 해야지.”하는 단계로 올라간다. 좀 더 나이가 들어 크리스마스와 산타 이야기는 온 동네 사람들, 교회의 교인들이 다 같이 축제에 참여하여 서로 선물(膳物)이나 카드를 주고받음으로 즐거움을 나누고 사회적 유대를 더욱 강화하는 기회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좀 더 장성하면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하나님이 땅으로 내려오시고 인간이 그를 영접(迎接)한다는 신비적 의미를 해마다 경축하는 날이라는 것까지 알게 된다.

산타 이야기의 문자적 의미, 윤리적 의미, 사회공동체적 의미, 신비적 의미 등 점진적으로 심화된 의미를 알아보게 되는 과정이다. 깊은 신앙(信仰)이란 문자주의를 극복하고 이를 초월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 뜻이 다중적(多重的)으로 포함되어 있다.

한국의 교회(敎會)가 이 두 가지를 개혁(改革)하지 못한다면 늘 걸음마하는 초보적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그 사명은 여전히 구호로만 그칠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점점 더 외면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신천지와 같은 사교(邪敎)집단이 교회(敎會)라는 이름을 당당하게 사용할 것이다.

이동순 목사 /천송교회,여주환경운동연합 상임&  yeojupe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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