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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56. 현동(玄同)하는 사람
장주식 작가

숲에는 나무가 많습니다. 소나무, 참나무, 생강나무, 벚나무, 진달래, 사시나무, 밤나무. 헤아리자면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나무가 곧 숲은 아닙니다. 숲은 나무만이 아니라 바위, 흙, 동물,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니까요. 나무 중 소나무라는 이름은 숲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구별해 주고, 숲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한편 소나무라는 이름은 숲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소나무 숲’. 이렇게 이름을 한정해 버리면 소나무 숲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제거될 위험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름은 어떤 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어떤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름’을 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노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말을 하지 않고, 말을 하는 사람은 본질을 모르는 것이다.”

여기서 노자가 제기한 ‘말’의 문제가 곧 이름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름이라는 한정된 형식 말이죠. 한정된 형식에 매여 왈가왈부하다보면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지 잊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모임을 만든 K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K는 모임을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이고 정성스럽게 준비를 했습니다. 첫 모임에 백여 명이 참여했고, 소문이 나자 점점 사람들이 늘었습니다. K는 이제 잡지도 준비를 했습니다. 시대를 고민하고 삶의 방향을 제안하는 이야기를 담아내는 잡지였죠. 생활이 넉넉하지 않은 K이지만 하루 중 대부분을 잡지에 쏟아 부었습니다. 무보수로 말이죠. 사람들이 안타까워서 이렇게 말합니다.

“뭘 먹고 살아요? 그렇게 맨땅에 머리 박으면 말이에요.”

그러면 K는 허허 웃으며 대답하죠.

“보람을 먹지요.”

모임을 이끌고 잡지를 만드는 ‘보람’이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K의 헌신에 감동한 많은 사람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자 모임은 활성화되고 잡지는 큰 반향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렇게 십 년 세월이 흘러 모임도 시들해지고 잡지를 만드는데 헌신하는 사람들도 줄어들었습니다. 그러자 모임을 이끄는 사람들이 말합니다.

“잡지를 그만두든가, 모임 방향을 바꾸든가, 어떤 결판을 내야겠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K의 생각이 궁금했습니다. 모임에서 토론 자리를 만들고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K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다들 궁금하고 약간은 긴장한 얼굴로 K를 봅니다. K가 빙긋 웃으며 말합니다.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토론 자리 내내 K는 더는 말이 없었죠. 잡지는 그만두기로 했고 모임도 방향을 바꾸는 걸로 결정이 났습니다. K는 그냥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걸로 결정을 받아들이더군요.

 

노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분별심을 풀어버리고 빛을 부드럽게 하여 세상 티끌과 하나가 된다.”

 

날카로움이나 분별심이나 빛은 내가 가진 생각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생각이 예리하면 상대가 베일지 모르고, 각각 이름 지어주고 한정하여 나누는 분별심을 가지면 상대가 불편할 것이고, 내가 내뿜는 빛이 너무 강하면 상대가 눈을 뜨지 못하겠지요. 그러므로 무디게 하고, 풀고, 부드럽게 하여 상대와 하나가 되는 경지, 그것을 ‘현동’이라고 노자는 말합니다. K는 아마도 현동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K는 매우 부드럽고 주변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사람이니까요.

 

숲도 그렇습니다. 온갖 나무들이 뒤섞여 있지만 각자 자기를 드러낼 때가 되면 환하게 꽃을 피웠다가 다시 물러납니다. 이른 봄에 생강나무가 노랗게 자신을 드러냈다가 물러나면 연본홍 진달래가 나오고, 진달래가 들어가면 산목련이 흰색으로 무대에 나오듯이 말이죠. 그러나 생강나무도 진달래도 산목련도 현동하여 숲이 됩니다. 숲에서는 생강나무가 진달래보다 귀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진달래도 산목련보다 귀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동하는 사람은 친소, 이해, 귀천이 없습니다. 세상 티끌 모두를 하나하나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현동하는 사람 그 스스로도 귀하게 되는 것이죠.

 

<노자 도덕경 56장 : 知者不言(지자불언)하고 言者不知(언자부지)하니 塞其兌(색기태)하고 閉其門(폐기문)이라. 挫其銳(좌기예)하고 解其分(해기분)하며 和其光(화기광)하여 同其塵(동기진)하니 是謂玄同(시위현동)이라. 故不可得而親(고불가득이친)하고 不可得而疏(불가득이소)하며 不可得而利(불가득이리)하고 不可得而害(불가득이해)하며 不可得而貴(불가득이귀)하고 不可得而賤(불가득이천)하니 故爲天下貴(고위천하귀)하나니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사람은 본질을 모르는 것이니, 그 구멍(감각하는 구멍들)을 막고 분별이 나가는 문을 닫는다. 날카로움을 꺾고 분별심을 풀며 빛을 부드럽게 하여 티끌과 하나가 되니, 이를 일러 현동(그윽한 하나 됨)이라 한다. 현동이 된 사람은 가까이하거나 멀리함이 없고, 이롭게 하거나 손해나게 함이 없고, 귀하거나 천함이 없으니, 세상에서 아주 귀한 존재가 된다.

장주식 작가  yeoju5@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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