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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52. 이상한 날

장주식의 노자와 평화 52. 이상한 날

  • 기자명 장주식 작가
  • 입력 2019.12.31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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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식 작가

그날은 참 이상하기도 하고 희한한 날이었습니다. 서울에 볼일이 있어 집을 나섰습니다. 나는 작은 도시, 거기서도 시내에서 꽤 먼 강마을에 살고 있어 2-3시간에 한 번씩 오는 시내버스를 탔습니다. 서울 가는 고속버스가 서는 승차장에 가려면 30분 정도 걸립니다.

면소재지를 지날 때입니다. 한 떼의 젊은 남녀가 버스에 올라왔습니다. 뒤쪽 좌석에 몰려 앉은 그들은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합니다. 흥에 겨운 소리들이라 처음엔 듣기 좋았는데요, 갈수록 듣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들 중 두 명이 “존나!” “씨발!”이란 말을 끊임없이 반복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에게는 거의 호흡처럼 내뱉는 습관화 된 말인 듯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듣기가 영 거북했습니다.

그럭저럭 고속버스 승차장에 도착해 고속버스를 기다렸습니다. 차 시각이 이십분 넘게 남아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또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자 둘 여자 하나 셋이 나타나더니 담배를 피워 물더군요. 뭐 그런가보다 했는데 그들도 “개”와 “씨”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험한 말을 계속 내뱉으며 이야기를 나누더군요. 담배 연기를 내뿜고 나서는 침을 돋아 땅바닥에 축축 뱉으면서 말이죠. 나는 좀 불편해서 자리를 옆으로 옮겼습니다.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고속터미널 화장실에 소변을 보러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고도 희한한 날입니다. 소변을 보고 나서 손을 씻으러 세면대로 갔는데요. 갑자기 한 남자가 소리를 버럭 지르는 겁니다.

“에이, 씨펄! 더러워 죽겠네. 에이, 씨펄!”

깜짝 놀라 그 사람을 쳐다봤는데요, 그 사람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이것 좀 보라.”고 하면서 자기가 손을 닦던 세면대를 가리키는 겁니다. 보니까 세면대 안쪽에 걸쭉한 가래침이 턱 하니 묻어 있더군요. 더럽기는 했지만 그렇게 큰 소리로 욕설을 내뱉어야 했나, 하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의 이상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 전철을 탔는데요, 전철 안에서도 뜻밖의 봉변을 당해야 했습니다. 서서 몇 정거장 가다가 내 앞에 좌석이 비었습니다. 내가 앉으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나를 밀치고 먼저 앉더군요. 나는 놀라서 그 사람을 바라보았는데, 노년에 가까운 그 여인이 앉은 채 나를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더군요. 나는 그 자리가 불편해서 주춤 주춤 옆으로 이동했습니다.

집에서 나와 세 시간이 걸려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굉장히 피곤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정말 희한한 날이었습니다. 평소에는 단 한 번도 겪지 않는 불편한 일들이 그날은 연거푸 쉬지 않고 일어났으니 말입니다.

노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아라. 그리하면 종신토록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노자는 어떤 구멍, 어떤 문을 말한 것일까요? 사람의 몸에는 구멍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입은 매우 중요한 구멍입니다. 음식이 들어가는 곳이며 말이 나오는 곳이기도 하니까요. 내가 서울에 가면서 들은 욕지거리들은 다 입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노자는 그 입을 막으라는 것이죠. 문은 무엇일까요? 추상적인 것 같습니다. 우리 ‘몸이나 정신’이 바로 욕망하는 것들이 드나드는 문을 말하는 것이지 싶습니다. 그 문을 닫으라고 노자는 말하는 것입니다. 그 입을 막고 그 문을 닫으면 생애 끝날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는 것이죠. 그럴 듯합니다.

하지만 이게 그리 가능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어찌 사람이 입을 막고 욕망을 그칠 수 있겠습니까. 노자도 그걸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덧붙여 둡니다.

“작은 것을 보는 눈을 가져라. 그리하면 밝아지리라. 부드러움을 지켜라. 그리하면 진정 강해지리라.”

크고 화려한 것들은 눈에 잘 보입니다. 우리가 지나치는 것들은 은미한 것, 정성스럽게 오래,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보지 않고 지나치는 것들이 많을수록 내 삶도 어둡다는 것이죠. 또한 진정한 강함은 욕지거리처럼 거친 말이나 경멸하듯 쏘아보는 싸늘한 눈빛에 있지 않을 겁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따뜻한 말과 웃음어린 눈빛이 훨씬 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압니다. 하지만 거칠어지고 싸늘해지는 까닭은 뿌리를 자주 잊어버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자는 말합니다.

“세상에 시작이 있으니, 이를 천하의 어머니라고 한다. 어머니를 얻었다면 그 자식도 알게 된다. 그 자식을 알고도 다시 어머니를 지킬 수 있다면 온 생애 위태롭지 않다.”

세상의 뿌리는 거친 욕지거리와 자상함, 부드러움과 강함, 밝음과 어두움을 다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식은 각각의 욕망들을 극대화 시켜갑니다. 극대화 된 뒤에는 돌아올 줄 모르고 그것이 마치 뿌리인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착각이 가득한 세상에는 욕망만이 넘쳐나고 거친 삶이 일상으로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겪은 그 어느 이상한 날처럼 말이죠. 이상한 날이 일상이 된다면 우리는 정말 위험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물론 우리는 다른 행복한 일상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진정한 뿌리를 잊지 않을 때 그것은 가능할 것이고 노자는 그것을 ‘습상(習常)’이라고 합니다.

 

<노자 도덕경 52장 : 天下有始(천하유시)하니 以爲天下母(이위천하모)이니라. 旣得其母(기득기모)하면 以知其子(이지기자)하고 旣知其子(기지기자)인데 復守其母(복수기모)이면 沒身不殆(몰신불태)하나니라. 塞其兌(색기태)하고 閉其門(폐기문)하면 終身不勤(종신불근)이지만

開其兌(개기태)하고 濟其事(제기사)하면 終身不救(종신불구)하리라. 見小曰明(견소왈명)이요

守柔曰强(수유왈강)이니 用其光(용기광)하여 復歸其明(복귀기명)이면 無遺身殃(무유신앙)하리니 是謂習常(시위습상)이라.>

 

세상에 시작이 있으니 이를 ‘천하의 어머니’라 한다. 이미 어머니를 얻었다면 그 자식을 알게 되고 그 자식을 알고도 다시 어머니를 지킬 수 있다면 생이 끝날 때까지 위태롭지 않으리라. 구멍(입)을 막고 문(온갖 욕망)을 닫으면 몸이 다할 때까지 근심걱정이 없지만 구멍을 열고 일을 벌이면 종신토록 구하는 걸 얻지 못한다. 작은 것을 볼 수 있음을 ‘밝다’고 하고 부드러움을 지킴을 강하다고 한다. 그 빛을 써서 밝음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면 몸에 재앙을 남기지 않으리니 이를 일러 ‘늘 그러함을 익힘(습상)’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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