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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강- 한강 제1지류 복하천②

한국의 강- 한강 제1지류 복하천②

  • 기자명 조용연 여행작가
  • 입력 2019.11.27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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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받은 땅 여주·이천을 감싸 도는 안개의 강

이른 아침 영동고속도로 호법분기점, 선잠을 깨며 토해낸 하품처럼 나른한 안개가 강원도로 가는 길목을 막아선다. 넓은 벌판을 아웃포커스로 만든 안개의 진원은 어디일까. 복하천이다. 용인 양지 제일리에서 발원하는 복하천은 이천 호법에서 장암천과 원두천의 위세를 업고는 국가하천으로 승진한다. 당당하게 이천을 지나 여주 흥천벌에 이르는 동안 나라님께 바치던 쌀을 살찌울 강물을 원 없이 나누어 주고 남한강에 안긴다.

용머리의 자랑, 양천 최 씨 집안 내력

호법면 후안리 용머리 마을 초입 용두교를 건너면 새로 세운 비석과 석물이 환하다. 거북 잔등에 올라탄 비신에는 한 집안의 출세에 대한 기록이 빼곡하다. 양천 최 씨 최위수의 묘와 비석이다. 조선 인조8년(1630년) 형조정랑과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까지 한 인물이니 높은 학식을 갖춘 조선의 고급관리가 아니겠는가. 

이 묘 터의 내력이 전설로 내려온다. 그가 죽자 용한 스님이 왈 “하관시 삿갓을 쓴 사람이 지날 것이니 물어보고 시키는 대로 하라” 일렀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삿갓 쓴 사람이 나타나기는커녕 그냥 아이가 소두방(솥뚜껑)을 이고 지나간 것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하관을 위해 광중을 파는데 바위아래에 석함이 나와 이를 깨니 붕어 3마리가 튀어나와 그냥 용머리 앞 복하천으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바로 솥뚜껑 쓴 아이가 귀인인데 몰라보았으니 복을 놓쳐 앞으로 후손이 높은 벼슬하기는 글렀다고 전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손자가 훈련원 판관과 호조 참판을 하고 15대손까지 통정대부는 기본으로 명신거유(名臣巨儒)가 줄줄이 쏟아졌단다. 증조부 묘조차 잃어버린 얼치기 집안의 자손인 나는 마침표도 없는 최 씨네 출세기를 읽어 내려가다 숨이 차 그만두었다.

예언도 점괘도 틀려야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이다. 없는 스토리텔링도 만들어내는 세상이니 전설을 보기 좋게 KO시킨 최 씨 집안의 공훈과 벼슬 자랑은 무더위 속에서도 유쾌하다. 오미교는 23km 지점이다. 대낮의 뙤약볕을 견딜 수가 없다. 일단 철수, 작전상 후퇴다.

이섭대천(利涉大川), 넓고 기름져 백성이 부유한 땅, 이천

월급쟁이의 라이딩은 주말로부터 정확하게 1주일 뒤에나 가능하다. 도드람산 앞에서 흘러내린 장암천과 모가면을 거쳐 온 원두천의 위세를 업고 지방하천이던 복하천은 비로소 국가하천으로 당당히 승진한다. 몸집을 불린 물은 영동고속도로 안개의 진원지쯤으로 지목받는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여전히 이 벌판에 서성거리고 있는 안개 속, 이천의 자전거꾼들은 호법면 초입 오미교를 강둑의 종점으로 여기고 되돌아간다.

이천이란 이름은 고려 태조 왕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국여지승람의 누정편이 발원이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후백제와 일전을 벌이려 복하천에 이르렀을 때 홍수가 났다. 이때 불후의 명장이자 외교담판의 대가인 서희 장군의 당숙 서목이 제대로 안내하여 냇가를 건너 전쟁에 승리했다. 기뻐한 왕건이 직접 주역의 ‘이섭대천’(利涉大川)에서 따와 이천이란 이름을 하사했다는 것이다.

이천의 진산 설봉산과 원적봉을 중심으로 조선의 선비들이 여주, 이천으로 이주한 것은 한양성 반경 50km 권역이라야 조정의 기별도 이내 감지되는 소위 상감마마의 ‘인사사정권’ 안에 들어 대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틀림없겠다. 

영동고속도로 복하교 아래를 지나면 판교-여주간 복선 절철이자 장차 강릉까지 연결될 경강선 철도와 마주친다. 

자전거 입장에서 그 철도의 개통은 또 한 번 수도권 자전거의 반경을 대폭 확대하게 될으로 전망했지만 실망이다. 그나마 개통 초기에는 자전거를 평일에도 동승을 허락하더니 주말, 공휴일로만 제한하는 쪽으로 후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복하교는 영남에서 올라오는 3번 국도의 이천관문이다. 2km 하류의 복하2교부터는 신둔천을 건너 백사면 들판으로 흥천에 이르거나 아니면 42번 국도를 따라 부발읍 신원1리까지 돌아갈 수밖에 없다. 복하천은 이 구간에(복하2교-흥천교) 둑길을 제대로 열지 않았다.

우측으로 효양산을 보며 언덕을 오르노라면 복해마을을 보게 된다. 풍수지리에서 이 마을에 대한 해석은 자못 흥미롭다. 

복해(伏蟹)마을은 게가 서남향으로 웅크린 형국의 길지라는 것이다. 풍수에서 게는 재물을 상징한다. 아마도 게의 집게발이 재물을 일단 물면 놓지 않는다는 해석이 아닐까. 게의 우측 발치에 옛OB맥주공장(현 신세계프레시푸드)이 있고, 좌측 발치는 옛 현대전자(현 SK 하이닉스)가 해당된다는 것, 주인의 손바꿈은 있었을지라도 곡식을 원료로 한 맥주와 산업의 쌀인 반도체가 여전히 이천의 큰 기업으로 경제에 공헌하고 있으니 풍수의 이름값을 한다고 해석한다. 

여주행 철도의 흔적은 농로로 남아 무촌, 죽당 같은 역 이름만 남긴 채 마을을 찾아 들판 길을 꼬불꼬불 돌아 매류, 연라리로 갔다.

바퀴를 돌려 들판길로 나서니 성남-장호원 자동차전용도로가 지나가는 고백리다. 들판으로 흥천까지 가는 길은 설명이 필요 없다. 그냥 툭 트인 농로를 타고 가다보면 수백마지기의 논이 연밭으로 변한 물웅덩이를 만난다. 진초록 연잎으로 뒤덮인 습지, 그리고 잘 자란 벼, 고구마 밭, 터줏대감 벼농사는 고구마와 연근같은 특용작물로부터 협공을 받고 있는 듯하다. 그게 우리 농촌의 현실이다.

기록적 폭우로 재난지역이 되었던 복하천 하류

다시 강둑을 보강하고, 정비를 끝낸 복하천 하류는 훨씬 든든해졌다. 2013년 7월22일부터 이틀 동안 403mm의 폭우가 내린 여주 흥천과 이천 백사 일원의 상처는 처참한 기록이었다. 

그때도 자전거를 타고 강둑길을 다니던 내 호기심은 멈추지 못했다. 재난지역으로 선포되면서 강둑에는 포클레인이 앞장선 강둑 보강 공사가 한창이었다. 흥천교에서 상백교에 이르는 4km의 강둑은 지천 보강 공사를 하다가 벼락을 맞은 셈이다. 흥천면 다대리, 하다리의 피해가 컸다. 

쓸려 내려온 토사로 덮인 농경지가 군데군데 그대로 있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것조차 미안하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태풍처럼 쓰러진 벼가 없고, 이내 배수가 되어 다행이라는 것이었다.

원래 강둑길도 중부내륙고속도로와 교차하는 지점까지만 나 있고, 나머지는 한가한 지방도 333번을 타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정부와 시민단체가 서로 4대강 사업을 사이에 두고 네 탓이라고 했지만 정작 강 언저리 흥천면 계신리 주민들은 4대강이 아니었더라면 큰 일 날 뻔 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렸었다. 

상백교 근처에서는 남한강이 멀리 보인다. 복하천의 유량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일까 아예 강둑 같은 것은 눈에 보이지도 없다. 

산더미 같은 퇴적토가 쌓인 버들습지는 부유 쓰레기의 주력군인 스치로폼으로 버무려져 있다. 

계신리 부처울 마을은 남한강을 동남쪽으로 바라보고 음각된 마애여래입상 말고도 큰 절터가 남한강 절벽 단애에 있었던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댓 평 남짓한 석불암 대웅전에는 마지 예불을 올리는 독경 소리만 낭랑하다. 

돌고 돌아도 50km 남짓한 물길이 길게 느껴진 것은 순전히 정수리까지 따가운 햇볕과 소나기까지 쏟아진 날씨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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