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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강- 한강5(양평·남양주·하남·서울)②

한국의 강- 한강5(양평·남양주·하남·서울)②

  • 기자명  /조용연 여행작가
  • 입력 2019.10.23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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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강의 봄, 두물머리에서 머리 풀다

북한강과 남한강은 두물머리 ‘팔당호’에서 비로소 몸을 합친다. 물기운 가득한 양평은 1981년 영하 32.8도라는 기록을 남겼다. 본시 양평은 땅뙈기 귀한 산촌이었다. 산협 언저리에 빼곡히 들어선, 서울 사람들의 별장과 은퇴 주택은 배산임수의 가치를 나날이 더해간다. 하루면 마포나루까지 가던 뱃길이 끊어진 지도 오래다. 그 길로 중앙선 기차가 수도 서울과 국토 심장 사이의 물류를 이어주느라 분주하다. 세월이 하 수상해서 그런가. 이 봄볕에도 올림픽대교의 성화 조형과 123층 롯데월드타워는 연무(煙霧) 속에 아득하기만 하다.

 

자전거로 화색이 도는 팔당, 모래로 되살아난 당정섬

팔당댐이 물을 가둔 보람은 이만저만 아니다. 홍수 조절기능도 그러하지만 먹는 물을 광역상수의 이름으로 수도권에 공급하는 공은 빼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처럼 흔전만전 물을 써대는 사람들도 없다. 예봉산과 검단산 사이를 홈통 지나가듯 하는 한강이기에 댐을 만드는 적지였다. 

평소 댐 아래 강바닥은 수마된 암반이 앙상하게 드러나지만 팔당대교를 지나 당정섬에 이르면 물길이 넉넉해진다. 당정섬은 산곡천과 덕풍천이 한강으로 흘러들면서 만든 모래섬이다. 1986년 한강종합개발사업으로 골재를 파내 사라졌던 섬이 2002년부터 다시 생겨나기 시작했다. 자연의 퇴적이란 그런 것이다. 사라졌던 철새도 돌아왔다. 큰고니(천연기념물 201호) 300여 마리와 참수리, 흰꼬리수리, 원앙, 비오리 등 40여종 5,000 여 마리가 해마다 겨울을 나러 몰려든다. 환경교육센터는 고니학교도 열고, 고니축제까지 여는 걸 보면 자연은 그렇게 상처입고도 치유할 수 있는 위대한 힘을 지닌 게 분명하다.

1970~80년대를 풍미하던 미사리의 통기타 부대와 카페촌의 50여 개나 되던 밤무대는 그야말로 멸종 직전이다. 세계금융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2009년 이종환의 <셸부르>가 문을 닫은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오전 10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날밤을 새우며 통금해제 시대를 만끽하던 젊은 날은 돌아올 가능성이 희박하다. 윤시내의 <열애>와 송창식의 <쏭아>가 고군분투하기에 애처롭지만 고맙다. 거기서 박강성과 같은 미사리 발(發) 스타를 다시 만날 가능성은 제로다. 

당정섬처럼 복원된다면 오죽 좋으랴. 강둑길은 넓어졌다. 스타필드와 상업 시설들이 들어서고, 먹자촌이 몸집을 불려가지만 비싼 임대료 속에 추억의 무대가 다시 돌아오기엔 통기타가 너무 쇠잔해 보인다.

삼패지구는 한강을 남향으로 소유한 덕소의 아파트 정원처럼 더 잘 가꾸어졌다. 이제 코스모스 둔치로 수도권의 명소가 된 ‘구리 한강시민공원’도 한강종합개발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얻어낼 수 없는 전리품이다. 또한 쓰레기소각장 굴뚝과 겸용으로 들판에 솟아오른 구리타워야 말로 환경과 위락이 결코 적대적 관계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사랑했던 워커힐 언덕

한강은 구리를 지나 아차산을 마주하면서 크게 감돈다. 그 언덕에 ‘워커힐’이 있다. 1950년 6.25 전란 중에 의정부 근처에서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 워커사령관을 애석해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붙여준 이름이다. 그 언덕은 호텔의 이름이 되었다.

2000년을 전후한 기억 한 토막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워커힐 언덕을 유난히 사랑했다. 주말이면 워커힐 별장으로 남모르는 행차를 했다. 조선 시대로 말하자면 ‘별궁 행차’였다. 하기야 청와대 경내에서 갇혀 지내는 것이 얼마나 답답하였으랴. 관할 경찰서장인 나 또한 아무도 모르는 비상대기를 해야 했다. 워커힐 언덕의 맨 꼭대기에 있는 그 별장에서 바라보는 한강은 풍수로도 최고의 명당이다. 누구나 서보면 바로 ‘아하!’ 소리가 절로 나온다. 서해로 흘러드는 한강수의 정기를 가슴으로 안는 형국인데다 아침 해가 바로 방안으로 들어오는 정동향이다. 대통령도 사람일진대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여백을 갖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리라.

사라진 ‘잠실섬’과 ‘뚝도’의 희미한 기억

광진교를 지나면 확실히 서울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든다. 충주를 경유해 동래로 가던 길, 원주를 지나 동해로 가던 길, 발동기가 끄는 도선(渡船) 시대를 마감하고 조선에서 2번째로 긴 다리로 오늘날 3번 국도가 이어진 것이 1936년이었다. 

사장교인 올림픽대교의 성화모형과 멀리 잠실 월드타워 123층이 연무 속 허공에 걸려 있다. 번영 한국의 상징이나 어쩐지 윤곽이 번져 보인다. 

잠실은 ‘섬’이었다. 오래된 기억도 아니다. 1971년까지 그랬다. 그해 4월 ‘잠실섬’을 육지로 만들기 위해 풍납동 언저리에 물막이 공사를 하고, 남쪽이 본류였던 한강의 물줄기를 뚝섬 쪽으로 돌리기 위해 지금의 동서울터미널 앞을 파헤치는 하천 절개공사를 해야 했다. 결국 신천, 잠실 두 마을에 100여 가구가 살던 200만 평 잠실섬은 육지가 되어 장미아파트가 되고, 롯데 천지가 되었다. 그 남쪽 흔적이 석촌호수다. 

강폭이 워낙 넓다 보니 갖다 메울 흙이 부족해 몽촌토성까지 헐어서 옮길 궁리를 했으나 백제의 유적이라는 것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한 때라 불발되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렇게 사라져버린 고양군 뚝도면 잠실섬은 흔적도 없는 송파장(松坡場)의 영예를 오늘날 롯데타운의 부활로 조금은 보상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뚝섬은 여전히 유원지로 북적거리고, ‘뚝도시장’도, ‘뚝도우체국’도 여전히 살아있으나 3류라 정겹던, 청춘 아베크의 명소 ‘뚝도극장’은 사라진 지 40년이 다 되어간다.

무너진 성수대교의 기억, 대한민국 튼튼하게

아직 쌉쌀한 봄날, 오늘의 여정도 끝나간다. 철골 골조가 유난히 촘촘해 보이는 성수대교를 지난다. 성수대교는 삼풍백화점과 더불어 붕괴의 대명사다. 

한강의 기적을 비웃기라도 하듯 건설된 지 15년 만에 상판이 무너져 내려 49명이 추락하고, 32명이 사망하였다. 하필 그날은 1994년 10월 21일 ‘경찰의 날’ 아침이었다. 

무너져 내린 상판 위에 함께 추락한 버스에 타고 있던 전·의경은 전원 살아 구조 활동을 벌였다. 애꿎은 무학여고생 8명, 그 꽃다운 청춘이 허망하게 강물에서 져 버렸다. 

아는 사람도 드문 위령비만 서울숲 옆 인터체인지에 갇힌 채 소음을 어쩔 수 없이 견디고 있다. 있을 수 없는 일에 대한 반성으로 대한민국이 더 튼튼해지기를 소원한다. 해 저문 두모포 그 언덕에 이내 노란 개나리가 진혼의 곡조로 피어나리라.

□한강(양평-중랑천 합류구간의 지류하천)
-국가하천: 북한강, 경안천, 중랑천(제1지류)
-지방하천: 양근천, 성덕천, 복포천, 덕풍천, 홍릉천, 왕숙천, 고덕천, 성내천, 탄천 등 제1지류 44개
〔한국하천일람,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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