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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강-자전거로 걷다-한강2 (강원-동강 ②)

한국의 강-자전거로 걷다-한강2 (강원-동강 ②)

  • 기자명 조용연 주필
  • 입력 2019.08.27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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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강을 잃어버릴 뻔하다니. 동강②

국토교통부가 발행하는 하천지도에 동강은 없다. 그냥 정선에서 영월에 이르는 지방하천 한강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용틀임 치는 강, 한강의 굽이굽이 아름다운 절승이 다 모여 있는 이 산골짜기는 원래 영월사람만 아는 동강이었고, 서강이었다. ‘동강(東江, 조양강)’이 동강 날 뻔한  댐 건설의 논란은 이 강을 전 국민의 가슴속에 소중한 자연환경의 상징으로 남겼다. 강둑길도 때론 사라진다. 자전거는 물론 계곡 트레킹조차 범접을 허락하지 않는 동강의 속살, 래프팅의 물보라 속에서 그저 흘러가며 골짜기 안의 신비를 잠시 들춰볼 수 있을 뿐이다.

 

TV 단막극의 오랜 잔영, 가수리

언덕에 자리한 느티나무는 어른 대여섯이 둘러서서 안아야 하는 거목이다. 동강의 애환과 뗏목의 긴 바닥 행렬을 지켜보았을 터이다. 1980년대 초, 동강길을 지나갔던 기억이 새롭다. 그땐 느티나무 아래에 점방(가게)이 하나 있었다. 사방 한 뼘 남짓한 유리를 잘게 끼운 점방에는 경월소주도 있었고,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캡틴큐’(한 시절 서민들은 그게 양주의 전부인 줄 알았다.)도 선반 구석에 있었다. 라면을 끓여서 먹은 기억도 있다. 거긴 주막의 후예쯤 되었다. 정선읍에서 들어오는 강원여객 버스는 먼지를 뽀얗게 날리며 가수리 느티나무 밑에서 되돌아갔다. KBS였다.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단막극이었다. 아마도 ‘TV문학관’이 아니었을까. 막차로도 들어오지 않는 사내를 기다리는 주막집 색시는 술기운에 눈이 풀려 있었다. 태운 사람도 없이 돌아가는 막 버스의 엔진소리는 아득하게도 길었다. 바로 그 촬영의 현장이 지금은 없다. 그저 느티나무만 그날을 지켜보았겠지. 

1993년 물난리는 점방을 쓸어가 버렸다. 이때 영월읍의 절반이 물에 잠겼으니 강물에 기대어 산다 해도 홍수는 두렵고도 지긋지긋한 존재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 후로 가수리 사람들은 물을 피해 동남천 골짜기 안으로 집들을 새로 지었다. 골지천과 조양강이 어천을 합해 토해내는 물이 고한에서 흘러 내려오는 지장천(옛 동남천) 물까지 합하면 한 방울도 새 나갈 틈이 없다. 그저 영월, 단양 물이 얼마나 빨리 흘러가 자리를 내주는가에 기댈 수밖에 없다. 가족을 데리고 낚시하던 사람들도, 사진을 찍으러 동강으로 오는 사람들도 가수리에서는 이 느티나무 밑에서 쉬어간다. 동강의 이정표다. 여행가 김인걸이 <한국의 비경>에서 계곡 트레킹의 명소로 자랑하던 동남천의 골짜기도 고한 쪽에서는 거의 다 포장을 해서 들어왔고, 가수리에서만 4km 남짓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을 뿐이다.  

강가를 따라가는 길이니 그다지 힘들게 없다. 섶다리가 놓였었고, 줄을 잡아당겨 건너다니는 배들도 두어 집 독가촌이라도 잠수교를 놓고 나니 거의 사라진 풍물이 되었다. 가탄, 수동마을, 운치리를 지나 점재마을로 건너가는 나루는 늘 등산객들로 붐빈다. 동강의 그 굽이굽이 용틀임을 제대로 조망할 수 있는 산행의 최정상이 백운산(882m)이다. 칠족령으로 내려와 문희마을로 가거나 제장마을로 가거나 절경의 강마을이다.

개발에 비교적 관대한 쪽에 속하는 나로서도 ‘동강댐’ 건설을 그만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는 생각이다. 1996년부터 시작된 건설계획은 환경단체의 반대로 점화되어 결국은 대통령까지 나서게 되었다. 1999년 8월 김대중 대통령이 “수도권 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꼭 댐을 건설하지 않고도 절수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으며, 홍수피해를 막기 위해 댐이 꼭 필요한지도 과학적으로 확실치 않다. 개인적 의견으로는 댐 건설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고 했다. 대통령의 언어에 개인적이란 말은 어딘가 어색하다. 완곡한 화법이긴 하지만 그 누가 지엄한 영(令)을 거스르겠는가. 어쨌든 수몰을 굳게 믿고 긴급히 과수 묘목을 심어 보상을 노렸던 사람들은 망했고, 금수강산 최고의 비경 동강은 살아남았다. 여전히 물 문제는 미완의 과제로 남아 우리를 괴롭히고 있긴 하지만 다행이다.

외길터널이거나 재를 넘어야 하는 자전거

점재나루에서 거운리 섭새나루까지 30km가 넘는 골 안 물길은 이제 길을 거부한다. 마을에서 외지로 통하는 길들이 있다 해도 수많은 여울의 나루에서 끊긴다. 줄배를 타고 건너간다 해도 산으로 올라붙지 않으면 길이 없다. 자전거가 범접할 공간은 더더욱 없다. 자전거는 고성교에서 산길을 따라 넘는 고행을 마다할 수가 없다. 지금은 산 고개로 길이 시원하게 나 있지만 예전에는 예미로 넘어가는 산 8부 능선에 난 고성터널이 주도로였다. 차 한 대밖에 지나갈 수 없는 터널이다 보니 반대편에서 오는 차의 불빛을 잘 살펴 진입해야 한다. 터널 안에 피양할 수 있는 홈이 세 군데나 있지만 전등 하나 없으니 무섭기 조차하다. 그래서 일부러 이 길을 찾는 사람들도 있고, 동네 사정에 밝은 차들이 무시로 넘나든다. 1980년대에도 있었던 터널 진입 신호등도 이제는 오히려 없다. 자전거를 타고 터널 안에 들어섰더니 뒤 따라오던 차 운전자가 굴 밖에 나와서는 “자전거는 산길로 가야지 터널로 가면 어떡하냐”고 되레 큰소리다. ‘누가 몰라서 산 고개를 안 넘는 줄 아나. 힘이 드니까 터널로 가는 거지’ 저마다 제 입장이 우선인 게 오늘의 세태인지도 모르겠다.

예미를 거처 영월로 접어들고 보니 섭섭하기 짝이 없다. 동강의 속살을 지나쳐버려 어딘가 한 귀퉁이가 빠진 듯하다. 뗏목의 길을 다시 가 봐야겠다.(시간을 넉넉히 잡을 수 없어서 한주 뒤에 래프팅으로 기어이 속살을 보고야 말았다.)

물길 아니면 볼 수 없는 동강의 속살 

골 안의 물돌이는 하늘에서 바라다보면 거의 미친 듯이 승천하는 용의 모양새가 그러할까? 도저히 뱀의 사행(蛇行)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용틀임이 맞을 것이다. 점재, 제장, 소사, 가정, 문희, 만지, 섭새 같은 나루를 만들면서 강안(江岸)의 삶을 이어주었다. 석회암 지형인 이 지역에는 백룡동굴을 비롯한 256개의 크고 작은 동굴이 있다.

1950년대 초반 6.25전쟁이 끝나고 이 물길의 주인이던 뗏목의 시대도 끝났다. 뗏목하면 북한강은 인제 뗏목이고, 남한강은 정선 뗏목이었다. 벌목과 산치성(고사), 운목, 토장(야적), 뗏목 엮기의 과정을 거쳐 뗏목 5~6바닥(한 바닥:소나무 150~200그루, 너비 4~9m, 길이6m)이면 대형 뗏목선단이 되었다. 앞동가리에는 거레(노)를 설치하여 좌우로 움직여 조종을 하고, 뒷동가리로 갈수록 통나무2~3개씩을 줄여 운신이 쉽도록 하였다. 2~3명의 떼꾼(사공)은 고참(앞구잽이)이 앞에, 신참(뒷구잽이)은 뒤에 섰다. 뗏목은 겨울에 엮었다가 첫 떼(갯떼기)는 3~4월에 시작했고, 막 떼(막서리)는 늦가을까지 떠났다. 피리밥, 골새, 여비를 챙겨 떠나는 한양까지 길은 멀고도 험했다. 그중 정선 아우라지에서 영월 덕포까지 2~3일 걸리는 골 안 뗏길이 가장 험하고 두려운 길이었다. 얼마나 험했으면 이 골안 떼만 운행하는 전문 떼꾼이 있을 정도였다 한다. 특히나 무서웠던 곳은 아우라지 상투비리, 용탄 범여울, 평창 마하 황새여울, 영월 거운리 된꼬까리(꼬까리는 여울의 강원도사투리), 삼옥리 제남문이다. 때로 목숨을 잃을 만치 힘이 들었으니 어라연 아래 만지나루 근처에는 전설적인 주모 전산옥의 주막집이 떼꾼들을 위로하고 힘을 내게 해주는 정거장이 되었다.

강 언저리가 알록달록하다. 국민위락 스포츠가 되어버린 래프팅 대열이다. 끝없는 관광버스의 행렬, 그리고 크고 작은 고무보트를 실어 나르는 트럭들의 굉음이 분주하다. 

제장마을에서 출발하여 섭새에 이르는 6시간 코스는 체력이 좋은 마니아들이나 선택하지 보통은 문산나루에 출발하는 3시간 코스 11km가 제격이다. 청춘들만 모여든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어른들의 유희, 아줌마들의 목소리가 아저씨들을 압도한다. 대개 산악회 버스로 몰려들고, 동창회, 친목계 단위로 이 골짜기에서 스트레스를 날려 보낸다. 어느 네티즌이 아줌마 아저씨들이 하도 고함을 치고 노래를 불러 고기들이 산란을 못하고 쫓겨 가버렸다고 한탄하는 글이 무리가 아닌 듯도 하지만 이렇게라도 놀 수 있는 공간이 어디 흔한가 말이다. 가물고 가물었던 끝에 그래도 찔끔 내린 상류의 장맛비로 물이 좀 불어 바닥이 긁히는 것은 간신히 면한다. 어라연의 모래톱과 기암에 올라앉은 소나무는 과연 ‘햇살에 비친 물고기의 비늘이 비단처럼 아름답다’고 붙인 어라연(魚羅淵)의 이름값을 한다. 물길이 허옇게 치솟는 ‘된꼬까리’ 여울을 왜 그리 떼꾼들이 무서워했는지도 알 것 같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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