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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민족투쟁과 교육구국운동 선구자 장춘명

항일민족투쟁과 교육구국운동 선구자 장춘명

  • 기자명 이장호 기자
  • 입력 2019.02.26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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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에서 목사로, 교회와 교육기관 설립으로 인재 양성

<사진설명-흑백사진> 1970년 촬영한 여주읍 시가지 전경(사진=여주시청) 멀리 중앙감리교회가 보인다.

*<여주신문>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일신의 안위보다 공동체의 운명과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항일민족투쟁에 나섰던 선열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뜨거운 삶으로 일궈낸 오늘 대한민국과 여주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키 위해 특집을 싣는다. -편집자

2개의 비석에 담긴 이야기

여주시 여주중앙감리교회에는 교회 창립100주년과 장춘명 목사의 공적을 기념하는 비석 2기가 나란히 서 있다. 지난 1994년 11월 27일 세워진 이 비석들은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진듯하지만 그 주인공은 바로 장춘명 목사다.

여주중앙감리교회 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겐 다소 낮선 이름인 장춘명 목사는 1898년 범솟교회(현 여주시 점동면 처리교회)와 맹골교회(현 여주시 가남읍 삼군교회)를 세웠으며, 1902년 여주읍교회(현 여주중앙감리교회)를 비롯해 여주, 이천, 장호원, 음성, 충주 등 각처 83곳에 교회를 설립했다.

또 한말 갑오개혁 이후 개신학교(1904년, 가남읍 삼군리), 음성학교(점동면 청안리), 여흥학교를 설립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장춘명 목사 공적 기념비)

충주 3.1만세운동에 영향

그의 이야기는 여주와 인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충북 충주3.1운동기념사업회 전홍식 대표는 장춘명 목사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그 분은 경기남부지역 항일민족투쟁의 신화적인 인물”이라며, 올해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충주시에서 장춘명 목사와 관련된 곳은 충주시 성서동 젊음의 거리 번화가의 영화관 매가박스로 이곳은 충주지역 첫 번째 교회인 서문밖(西門外)교회(충주제일교회)의 터다.

충주3.1운동기념사업회와 충주제일교회에 따르면 1913년  8대 목사로 장춘명 목사가 부임한 후 충주제일교회는 민족주의 성향을 띠게 되었고 그의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나서게 된다.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에는 양손자인 장양헌 전도사(여주군 소개면 삼포동 출생)를 중심으로 3.1운동을 전개했다.

장춘명 목사가 전면에 나서지 않은 것은 당시 그의 나이 64세, 당시로서는 노인이라 여겨져 전면에 나설 수 없었으며, 그의 항일민족투쟁의 정신에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이 나선 것이라고 한다.

출생과 성장, 그리고 그의 풍모

장춘명 목사는 1856년 이천 설성면 송계리에서 출생해 여주 가남읍 삼군리에서 성장했으며, 키가 장대하고, 체격이 우람했으며, 음성이 우렁차고 달변으로, 성격도 활달하여 그의 앞에서는 누구나 위압감에 사로잡히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호탕하고 의협심이 강하여 불의에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에 의한 명성황후 학살의 비보로 봉기한 을미의병전쟁 때 구연영 의병장 부대에 합세해 이천 넋고개 전투와 광주 이현 전투를 거쳐 한때 남한산성을 점령하는 의병에 참여했다. 1896년 여름 을미의병이 거의 해산한 후 그는 의병동지였던 구연영(구춘경)과 한께 1897년 기독교 신자가 된다.

=의병에서 목사와 교육가로

장춘명 목사는 1899년 이천 덕뜰교회(현 이천시 오천면 덕평리 덕평교회)에서 의병동지 구연영과 함께 세례를 받은 후 성경, 찬송가, 교리서적을 팔며 전도하는 권서(勸書)가 되었다. 

그가 예수를 믿고 전도자로 나선 것은 단순한 신앙차원뿐 아니라 구국차원에서였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즉 의병운동을 통한 민족구원의 의지가 좌절된 후 귀향한 그에게 새로운 힘으로 접근한 것이 기독교였다. 1894년 동학운동 후 청일전쟁과 을미의병전쟁을 겪으면서 민중들의 피난처의 하나로 교회가 등장했다.

민중의 눈에는 선교사를 배경으로 한 기독교는 동학도나 청일 양국 군대, 조선 정부도 침범할 수 없는 치외법권 영역으로 보였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 달변으로 알려진 장춘명 목사가 의병동지들을 찾아다니며 ‘예수 믿고 나라를 구하자’고 권하니 의병동지들도 크게 호응하여 그의 전도는 큰 효과를 거두게 되었다고 한다.

전도로 구국과 교육에 전념

여러 기록에 의하면 장춘명 목사는 성경, 찬송가, 교리서적을 지고서 이천, 장호원, 용인, 양지, 양평, 죽산, 음죽, 진천, 충주, 원주, 제천 등지의 태산준령을 넘고 물을 건너며 복음을 전하였으며 여주군을 위시한 83곳에 교회와 여주의 여러 학교를 세웠다. 앞서 소개한 그의 양손자 장양헌은 1913년 여주 개신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배재학당 고등과를 수료한 후 서울 서대문 피어선성경학원에 입학하는 등 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장춘명 목사의 이런 왕성한 활동과 성과는 그가 신앙과 구국운동을 동일시했으며, 의병활동에 쏟았던 열정을 신앙 활동을 통한 교육구국운동을 통해 실현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군중집회로 구국운동도 펼쳐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구연영(구춘경)은 이천, 광주, 장호원, 여주 등지를 순회하면서 군중집회를 통한 구국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면서, 의병동지인 장춘명은 여주지역을 담당한 것으로 보아 여주지역에서의 모든 집회는 장춘명 주도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일본의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조약체결을 철회할 것을 촉구하였으며 국권수호를 위해 국민들의 단결을 호소하고 시장철시를 통한 비폭력 저항운동을 주도했다.

구춘경과 의병동지인 장춘명은 여주지역을 담당한 것으로 보아 여주지역에서의 모든 집회는 장춘명 주도하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나눔으로 완성한 진실한 목자의 삶

 

현재 삼군교회 전경

장춘명 목사는 1916년에는 장로목사가 되었고, 1916년부터 1919년까지 충주구역 구역장을 지냈으며, 1921년까지는 이천구역에서 목회했고 1925년 은퇴하여 고향인 가남 삼군리로 돌아왔으나 살 집이 없어 예배당에 붙은 조그만 방에서 지내다 1933년 6월 11일 사망했다.

그가 개인으로 마련한 여주읍 교회 주택 252평과 삼군리 교회 예배당 부지 260평은 이미 총리원에 기증하여 유지재단에 편입해 놓은 상태였다.

의병으로 항일민족운동의 길에 들어선 후 신앙을 통한 구국운동과 교육운동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민족주의와 항일민족투쟁의 영향을 끼친 장춘명 목사의 정신은 오늘도 여주시 창동 여주중앙감리교회에 우뚝 서 있다.

<사진설명-흑백사진> 1970년 촬영한 여주읍 시가지 전경(사진=여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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