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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나라사랑글짓기대회] 한(韓)민족의 독립, 그 속에 뿌리내린 여주고등부 최우수상 여강고등학교 2학년 1반 27번 최천명

이 글은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 희생하신 여주 출신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여주독립운동가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제11회 나라사랑글짓기대회에서 고등부 최우수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매년 나라사랑글짓기대회와 웅변대회를 열고 있는 (사)여주독립운동가기념사업회는 순국선열의 날(11월 17일)을 하루 앞둔 지난 16일 여주도서관 여강홀에서 대회에서 입상한 학생들을 시상했다.<편집자 주>
나는 여주시에 살지만, 여주에 대해 잘 몰랐다. 또한 여주의 역사에 대해서는 더더욱 몰랐다. 하지만 초등학교 때 교육을 통해 일제강점기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게 되었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우리의 선조들이 얼마나 희생했는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쯤, 우리 여주에도 나라를 구하기 위해 힘쓴 독립 운동가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바로, 세 분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내용이었고, 나는 그들이 궁금했다. 그 때문에 그들에 대해 찾아보게 되었다. 그 중 첫 번째인 이인영 선생은 경기도 여주 출신으로, 을미사변과 단발령 등으로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의병에 동참 했다. 또한, 1907년 한.일 신 협약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하자, 그 전부터 을사조약으로 울분이 커져있던 각 지역 의병들은 의병 연합인 13도 창의군을 결성했다. 그 사이에는 여주 출신 독립운동가인 이인영 선생이 있었고, 의병들은 이인영 선생을 창의대장으로 임명했다. 그 후 창의 대장인 이인영과 의병들은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시작되자마자 이인영 선생은 부친상을 당하고 말았고, 갈등의 상황에 서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이인영 선생은 부친상으로 고향에 내려가게 되었고, 서울진공작전에서 빠지게 되었다. 이인영 선생은 부친상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갈등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을 했다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니다. 그는 나라를 위해 을미의병 때 유인석의 군대에 가담하여 왜적들과 싸웠으며, 나라를 구하기 위해 밤, 낮 없이 싸웠다. 그처럼 나도 두 가지 상황이 놓인 경우가 있었다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뒤 의병 활동을 했을 것이다. 선생은 의병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고, 그의 독립 정신 또한 대단했다. 선생은 조국을 버린것이 아니었으며, 되찾고자 하는 의지가 큰 조선인 중 한명 이었다. 그의 의지를 받아 여주에서 많은 사람들이 무장 독립 투사가 될 수 있었다. 두 번째로는 바로 김용식 선생이다. 여주에서 태어난 김용식 선생은 1919년 3.1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 되자, 4월 3일 여주시 천송동을 시작으로 만세운동을 벌였다. 김용식 선생은 3.1 만세 운동의 기본적인 약속이 되는 비폭력적인 운동을 몸소 보여주었다. 독립의지는 무장투쟁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의지를 표출하는 비폭력적인 운동에서도 나온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우리는 일제의 계속되는 탄압에도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세계 만방에 표출 했다. 세 번째로는 엄항섭 선생인데, 여주에서 태어난 엄항섭 선생은 3.1 운동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망명했고, 임시정부의 일원이 되었다. 임시의정원의 지역대표를 선출하기위해, 경기도 여주군 담당 국내 조사원이 되었다. 또한 김구 선생을 보좌하기도 했으며, 1929년 부터는 청년운동의 참여했다. 광복이후, 1948년에는 한국독립단 대표 5명과 함께 평양에서 회의를 했으며, 그 밖에도 많은 활동을 하신 분이다. 엄항섭 선생은 국외에서 나라의 독립을 추진 했고, 그의 대한 결과로 그들이 지켜온 조국에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는 큰 사람이 되어 그들에게 보답해야 한다.

여주신문  yeoju@yeoju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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