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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와 강변칠우>여강은 알고 있다. 강변칠우 사건 그 내막 ⑱

<여주와 강변칠우>여강은 알고 있다. 강변칠우 사건 그 내막 ⑱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7.12.22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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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유생들이 상소를 하다 -2

 

성흥환(전 한국문인협회 여주지부장)

그 훗날 이이첨(李爾瞻)은 이 사실을 듣고 몹시 분노하여 그 당배들과 공모로 사화를 일으켰다.

“성진사가 전 이조판서 성영(成泳)의 아들이라면서요?”

“예! 그러 하옵죠.”

“그럼 정장령은 여주에 내려가 상세한 내용을 알아보시오.”

“예, 다녀와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리하여 정조(鄭造)는 여주로 내려와 임진사를 비롯하여 대북파 끄나풀 몇 명을 불러 의논을 하였다.

“지난 계축년 7월에 성진사 무리가 무례한 행동을 하여 창피하기도 하고 시끄러운데 어이 하면 좋겠소.?” 하며, 장령 정조가 입을 열었다.

“암요, 성진사 중심으로 서원 유생들이 똘똘 뭉쳐 우리네 같은 사람은 발도 못 들여놓는 걸요.” 하고, 김생원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기천서원 사액 지연과 폐모론에 성진사의 불만이 이만 저만이 아닌 걸로 생각하옵니다.”

하며, 임진사는 내심 정조의 탓으로 돌려 가슴을 콕 찌르는 말을 하였다.

“불만이라 구요? 조정에서는 강변칠우 사건 후 여경내 불만을 품은 야당성 잔재들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데 그러면 알겠소.” 하며, 밑도 끝도 없이 알았다고만 하면서 서울로 올라갔다.

이 보고를 받은 이이첨(李爾瞻)은 어떻게 하면 성판서와 성진사 두 부자를 감쪽같이 옭가맬 수 있을까? 궁리궁리 끝에 고민고민 한다.

그리하여 역당과 결탁했다고 무함하면서 정조(鄭造) 등과 날마다 죄목을 얽어 낸 결과 병진년 5월 진사 성여격(成汝格)은 의금부의 압송으로 광해가 직접 추문하려 하였으나 마침 해주에 큰 역적 사건이 있어 풀려나온 동시에 성진사를 비롯하여 신조우(申祖禹), 민유청(閔惟淸), 우식(禹軾), 박시영(朴時榮), 신응망(辛應望), 성여상(成汝相), 이섬(李暹) 등 8인 유생들이 10년 금고로 정거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대북파 이첨의 무리가 양사의 합계로 청하기를, [최천건(崔天健)과 성영(成泳)은 유영경(柳永慶)의 심복으로서 정권을 쥐고 자기편 파당을 길러 성세를 펼쳐 예측할 수 없는 화란이 거의 일어날 뻔 하였습니다. 이어서 전 판서 성영(成泳)은 여주에서 상황을 엿보고 지내면서 무레한 자제들과 사위로 하여금 서양갑(徐羊甲)과 심우영(沈友英) 등의 강변칠우 무리들과 사귀어 역적들의 소굴을 드나들면서 그들과 한패거리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런 자가 요행으로 죽음을 면하였는데도 여전히 징계되지 아니하고 어진이를 공격하는 상소를 팔을 걷어붙이고 담당하였습니다.]

그런 말로 죄안을 조작하여 성판서는 멀리 연일로 유배를 시키었다.

이제 그들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는 옥사를 치르거나 유배길이 아니면 죽어야 할 길밖에 도리가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성판서는 오성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간당들의 폐모론을 극력 배척하였다가 이첨 무리에게 미움을 받았다. 거기다 계축년에 아들인 진사 성여격(成汝格)이 고을 인사들과 더불어 서원 유적에서 정조(鄭造)의 이름을 지우고 상소를 하였는데 이첨이 보고를 받고 분노하여 이런 모든 것들을 성판서의 탓으로 돌려 자기 도당들로서 대각에 있는 자를 사주해 백방으로 성판서를 모함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성판서를 얽어 맬만한 것이 없으니까 강변칠우들이 여주에 있었던 것과 관련하여 아들 형제와 사위 신조우(申祖禹)를 강변칠우 무리들과 어울리게 했다고 억지로 죄안을 만들어 병진년 11월 21일 연일로 정배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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