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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와 강변칠우>여강은 알고 있다. 강변칠우 사건 그 내막⑨

<여주와 강변칠우>여강은 알고 있다. 강변칠우 사건 그 내막⑨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7.08.07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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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적된 칠우들 국문을 당하다

 

성흥환(전 한국문인협회 여주지부장

얼마 후 광해군은 서청에 나가 친국을 했는데 추관으로 영의정 이덕형(李德馨), 좌의정 이항복(李恒福), 지의금 유공량(柳公亮), 동의금 조존세(趙存世), 대사헌 최유원(崔有源), 대사간 이지완(李志完), 형방승지 권진(權縉) 등 외 15명이 참석한 가운데 박응서를 끌어다 국문을 하였다.

계축년 4월 25일 죄인 박응서가 공초하기를, [죄인은 서양갑과 박치의가 주모자로서 정협, 심우영, 허홍인, 유인발 등과 역모해온지 4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틈을 얻지 못했습니다. 선왕께서 승하하신 뒤 중국 조정에서 조사가 나오자 허홍인과 서양갑이 활을 들고 남별궁 문 밖에서 조사를 쏘아 맞추고 그 때를 이용해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조사의 호의가 엄밀하였기 때문에 그 계책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지난해에는 이경준이 홍의군문의 명호로 격문을 작성하고 사대문에 붙여 민심을 동요케 한 뒤 곧 바로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마침 김직재의 변고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경준이가 격문을 도로 빼앗아 불태워 버리고 계책을 뒤로 미루었습니다.

그는 심우영, 허홍인, 유효선 등과 함께 여주 강변의 넓은 들판에 같이 살며 의식을 함께 하였는데 어느 날 흉모를 이야기하기를, ‘우리들이 뛰어난 재질을 가지고 있는데도 현 법제도 때문에 출세 길이 막혀 뜻을 펴지 못하고 있다. 사나이가 죽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죽는다면 큰 이름을 드러내 야 할 것이다.’ 지난해 봄에 정협, 허홍인, 박종인, 김비가 왕사라고 거짓 칭하고 부자인 이의숭의 집을 털어 금은을 도적질했으나 금액이 적어 분한 나머지 지난해 가을과 겨울 사이에 허홍인, 김평손과 함께 경상도에 가서 은상을 때려 죽여 수천 금을 얻은 다음 토호와 결탁하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금년 봄 정월에 서양갑과 심우영이 은상을 때려 죽이고 6, 7백냥을 얻었습니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와 친한 무사로 하여금 조정의 집정자에게 뇌물을 써서 선전관이나 내금위 수문장 등의 관직을 얻어 내응할 발판을 마련하는 동시에 또 금은을 집정자에게 뇌물로 줘 정협을 훈련대장으로 임명하고 금은과 비단을 모두 뿌려 300여인과 결탁한 다음, 야음을 이용해 대궐을 습격하려 하였습니다.

이때 제일 먼저 대전을 범하고 두 번째로 동궁을 범한 다음 급히 국보를 가지고 대비전에 나아가 수렴청정을 하도록 청하는 한편 성문을 굳게 닫고 백관을 모두 바꿔치려 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먼저 척리 총병 호위하는 관원을 죽이고 친구와 같은 패거리들로 조정을 채우는 동시에 서양갑 자신은 영의정이 되고 나머지는 순서대로 임명할 계획이었습니다.

또 유배중인 무리들을 석방하여 관직을 임명하므로서 동심 협력해 대군을 옹립케 하고 8도의 감사와 병사도 모두 같은 패거리로 채운 다음 사신을 보내 중국 조정에 주문하려 하였는데 그 내용중에는 차마 듣지 못할 점이 있었습니다.

이상 예상된 계획이었는데 아직 금을 대대적으로 모으지를 못했기 때문에 시일은 정하지 못했고 또 대비와 대군에게도 알리지 못했습니다. 3년 전에 심우영이 춘천 골짜기 안에 양곡을 비축해 두고 장래 군량으로 쓰려 하였습니다.

서양갑, 심우영, 허홍인, 김비, 유인발, 박치의, 이경준, 박치인, 정협, 김평손 등은 뜻을 같이해 의논이 이미 정해진 자들입니다. 이 역적 무리들이 흉측한 모의는 결정되었으나 군사와 말을 모으지 못했기 때문에 무슨 규례는 없고 서양갑, 심우영, 허홍인의 세 집에 병서와 고금의 진도가 쌓여 있으니 빨리 가져오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음~ 그래 네가 쓴 글 가운데 사대문에 격서문을 붙여 민심을 동요케 한 후 군사를 일으키려 했다는데 그 격문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이냐?”

“그건 제 입으로 차마 말씀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글로서는 쓸 수 있겠느냐?” 하니, 응서는 고개를 끄덕했다. 임금은 문사랑을 시켜 붓을 가져오라 하고 응서에게 붓을 주면서, “네가 입으로 말 못하겠다면 이 붓으로 써 보아라.” 하였다.

박응서는 임금의 죄악을 첫째 시부(弑父) 둘째 시형(弑兄) 셋째 음증(淫蒸)이라 열거해 쓰자 옆에 있던 추관이 차마 볼 수 없어 빼앗아 버렸는데 임금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불쾌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대역무도(大逆無道)라 하여 그 가족들은 물론 관련된 모든 사람이 혹독한 고문으로 자복하고 죽는가 하면 팔다리가 부러져도 입 다물고 죽는 자도 많았다.

여기서 광해군의 죄악을 보면, 첫째 시부는 아버지인 선조의 음식에 독약을 넣어 죽게 했다는 것이고, 둘째 시형은 자기 형인 임해군을 죽였다는 것이며, 셋째 음증은 광해군에게 서모격인 김상궁과 간통하였으니 죄악이라는 것이다.

대북파 역모 조작자들은 박응서 무리로 하여금 임금의 비위를 콕 찔러 줌으로서 더욱 더 열이 나고 성질나게 만들어 주었다. 사실 이 사건은 박응서가 아랫것들과 문경 새재에서 은장수를 죽인 것으로 그들의 대가를 받으면 될 것을 이첨 무리들은 응서를 꾀어 아무 죄 없는 서양갑과 심우영 등 많은 사람들을 영창대군 제거하는 제상에 올려놓았다.

이렇게 응서는 소를 올려 고발을 하면 죽음이 면할 수 있다는 말에 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동지를 팔아서 살 수만 있다면 암 살아야지. 그리고 김제남과 영창대군의 제물로 바치기만 하면 살려준다는 약속이고 거기다 훈신까지 될 수 있다는데 어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내가 저지른 살인죄 마져도 서양갑이가 우두머리로 시킨 것이라고 훌러덩 뒤집어 씌우는 판국인데 못할 것이 없다. 나 하나만 살면 누가 진실을 말할 것이냐? 동지들과 여주에서 약속한 우정을 나는 못지킨다.’ 응서는 중얼거리며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아니면 하늘이 무서웠는지 눈물이 핑 돌았다.

이틀 뒤 심우영이 공초하기를, [신은 빈한하여 살림 밑천이 없는데다 먹여살릴 식구도 많아 생활이 무척 곤란하였습니다. 그래서 서양갑과 서로 아는 처지라서 같이 상의하여 기전에 공한지를 얻어 볼까 생각 하였습니다. 그런데 듣건대 여주 양화천가에 버려진 제습지가 있다기에 이를 수축해서 농사도 짓고 또 어염의 이익도 챙길 목적으로 그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기였는데 박응서도 따라와 같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뒤 제언을 수축하여 농사를 지었으나 농사도 제대로 되지 않아 먹고 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춘천에 있을 때 서민의 딸을 데리고 살았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왕래하며 관곽을 팔아 생활 수단으로 삼으면서 몇 년을 보내었을 뿐입니다. 박종인과 정협 등을 응서가 서울에 살고 있을 때 그 곳에서 실제로 한두 번 만난 적이 있긴 합니다. 그 시기가 바로 지난해 2월 그믐 무렵이었는데 조사가 이때 과연 서울에 왔었습니까?

그리고 신에게 무슨 양식이 있어서 군량으로 쓴단 말입니까? 박응서가 살인한 대적으로 죽을죄를 모면해 보려고 감히 역모 했다는 설을 끄집어내어 여러 사람들을 불측한 지경에 빠뜨린 것입니다. 원하건대 모두에게 공초를 받아 보도록 하소서. 그리고도 의심할 단서가 있게 된다면 그 뒤에는 달가운 마음으로 형을 받겠습니다.]하였다.

따지고 보면 이 사건이야 말로 박응서가 행수로 장사치들이 서울로 오는 도중에 문경 새재를 넘을 때 다른 일행인 은장수를 죽인 것으로 살인강도범에 불과하다. 단지 서양갑과 심우영 등의 서얼들은 적서차별에 대한 불만이 있었을 뿐 조령 살인강도 사건을 모르고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었다.

이것을 꾀어서 단순한 강도가 아니라 자금을 모아 무력으로 대궐을 침입하여 광해군을 몰아내고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해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인 김제남과 역모하였다고 거짓 자백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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