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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우리는 반동도 빨갱이도 아닌 양민이다 ③

<여주>우리는 반동도 빨갱이도 아닌 양민이다 ③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6.11.04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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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당시 여주지역에서 247명의 민간인이 북한 인민군에게 반동이란 이유로, 남한 군인과 경찰에게 국민보도연맹이라는 이유로 억울하게 희생됐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부의 진심어린 사과와 진실규명을 위한 노력이 없이 지금 우리시대에 잊힌 하나의 작은 사건으로 치부되고 있다.
여주신문은 민간인 학살 사건을 여주시 유족회의 자문과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4번에 걸쳐 기획시리즈로 보도한다.[편집자 주]


-증언


   
 
▶원종익(85)씨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전쟁 나던 해에 몸이 안 좋아 중학교 5학년(요즘 고등학교2~3학년 쯤)을 다니던 중 4월에 내려와 병 치료를 했다. 병 치료를 하고 있던 중에 밤에 종종 아랫말 밤에 동네 청년들을 만나 마실을 다니기도 했다.


전쟁 터지기 4일 전에 아랫마을 청년들이 얼마 안 있으면 북한의 김일성군대가 내려온다고 말했다.


실제 며칠 뒤에 전쟁이 나는 것을 보고 남북 간에 긴밀한 연락망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6월30일 이전에 북한군 사이카(오토바이) 부대가 오금리까지 나타났고, 전쟁이 나자, 정태희 선생으로부터 야학을 배운 청년들이 완장을 차고 북내면 소재지에 나가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여자들은 여맹, 남자들은 청년동맹에서 10여명이 크게 아는 것도 없고 그래서 활동도 제대로 못했다. 그냥 왔다 갔다 하는 정도였으며, 장암리에서 보도연맹으로 학살된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주는 지형적으로 한강이 있다 보니 인천상륙 후 유엔군이 이천까지 왔다가 갔다. 여주까지 왔더라도 남한강을 건너지 못했을 것이다.(당시에는 다리가 없었음) 하지만 소문은 무성해서 강북쪽에 있는 북내면은 유엔군이 곧 마을까지 들어 올 것이라는 말에 주민들은 동요했다.


그래서 당숙 집안에서 유엔군이 오면 환영하자고 원씨 집안 형제들이 태극기를 그리다가 밤에 정보가 누설돼 빨치산들에게 붙잡혀 갔다.


인민군들은 실제 장암리에 들어오지 않았고, 당우리 숲까지는 온 것으로 기억한다. 인민군 점령기간 동안에 대부분은 빨치산들(일반 사복입고 헌팅캡 쓰고 대부분 엽총을 지니고 다님)과 지방빨갱이라고 하는 지역 사람들이 활동했다.


문제는 유엔군이 들어오면 환영할 태극기를 그린 사건에서부터 비극이 시작됐다. 누군가 밀고로 집안 형제들이 태극기 그린 것이 밝혀져 한 밤에 빨치산과 지역 빨갱이들이 같이 와서 잡아갔다. 모두 집안사람으로 6촌 원종학, 원종태 4촌 원종윤인데 가까운 집안 형제들이었다.


또 태극기를 그리지는 않았지만 어른으로 원장희씨가 붙잡혀 갔는데 이유는 동생이 그 당시 국방경비대에 근무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당숙 원창희(원종학, 원종태 부친)씨는 그 날 저녁은 무사히 피했지만, 석우리 민가에 숨어 있다가 밀고로 붙잡혀 모두 북내면 현암리 강둑 참호 속에 집어넣고 학살당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총을 쏘지 않고, 창이나 생매장으로 학살했다고 한다. 완전히 수복되고 나서 10월쯤, 시신을 현암리 강둑에서 수습했는데, 마차로 가득 싣고 온 것이 기억난다.
원종학씨와 함께 선린상고 다녔던 최용문(전북 군산 출신)씨는 친구를 따라 우리 동

네로 피란왔다가 함께 태극기 그린 것이 원인이 돼 함께 변을 당하기도 했다.


또 마을의 소임(소사)을 보던 강동원씨는 누에 작업장 잠실에 걸린 스탈린, 김일성 사진을 떼었다가 희생당하기도 했다. 아랫마을 쪽 좌익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은 수복이후 치안대에 의해 붙잡혀가 죽음을 당했다.
수복 후에 북내면 치안대가 구성됐는데 대장 말고 부대장이 바로 태극기를 그렸다는 이유로 죽은 원종윤의 아버지였다. 나에게는 삼촌인데 가슴에 생떼 같은 아들을 잃은 그 한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좌익 활동한 사람은 모두 잡혀갔고 당시 치안대장은 당우리 사람으로 성격이 매우 급해 희생과 관련된 많은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처형 방식은 북내지서에서 치안대장과 사찰계 A,B,C 로 분류해 버시고개에서 주로 처형했다는 말을 들었다. 치안대가 1951년 1월4일 좌익 소탕 작전을 했는데(본인도 치안대에 잠시 있으면서 양평이나 가평등지에서 내려오는 피란민을 검색하는 역할을 맡았음) 지서장이 오더니, 양평, 가평에서 피란을 많이 왔는데, 도민증이 없으면 무조건 따로 입창시키라고 했다.


그 날 지서 영창에 도민증 없던 양평, 가평 피란민이 20여명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철수하면서 소지개 고개를 넘어갈 때 북내 쪽에서 우당 쾅쾅 총소리가 났다. 주로 대왕사 계곡 쪽으로 대부분 희생된 것으로 알고 있다. 전쟁으로 사이좋던 마을사람들끼리, 또 같은 집안사람들끼리 그런 끔찍한 일이 있었다는 것이 생각하기도 싫다. 전쟁은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고 좌우를 막론하고 평화로운 삶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또한 불행한 민족사가 이제는 다시 반복되지 않았으면 한다.


   
 
▶고봉림(85)씨는 민간인 희생자 신동석(당시 23)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 당시 서울에서 대학졸업 후 무역회사에서 근무했고, 인물도 좋으며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집안이 부유해 비밀리에 라디오를 사서 듣기도 했고 근처에서 가장 갑부였다. 또 나에게 곧 수복이 되니까 조심해라는 등의 말을 자주했다. 신동석씨는 어떠한 이유에서도 좌익으로 있을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우익쪽의 사람이다. 다만 그 당시 상황에서 강제로 시키면 부역 일을 안 할 수 없었을 것이며, 부역일이라고 해봐야 동네일을 조금 봐주는 정도였다. 내룡리 누구에게 물어도 그 사람은 좌익이 아니라고 한다.


전쟁 시기에 좌익, 우익이 있었는데 안타까운 것은 그 당시 정부의 책임이 크다고 본다.


무엇보다 잘못이 있다면 사법당국의 재판을 받았어야 하는데 재판을 받지도 못하고 희생된 일은 이승만 대통령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또 죽지 않기 위해 좌익으로 있던 사람은 당시 분위기에 휩싸여 가서 한 것이다. 신동석씨는 결혼한 상태였고 부인과 딸이 하나 있었다. 국군의 1.4후퇴 때 주민등록(도민증을 말한 것으로 이해 됨)을 일반인은 다해주고, 좌익 쪽에 있었던 사람은 면사무소에 와서 받으라고 했다.


그래서 신동석씨 부인과 나의 누나가 면사무소로 주민등록 받으러 가려는데 동네 이장이 북내면에서 회의를 마치고 왔다. 대학 졸업자였던 신동석씨 부인은 가다가 분위기가 이상해서 이장에게 따지며 물었고, 그를 따라가지 않아 죽음을 면했다.

당시 이장을 따라간 사람은 어린애까지 모두 죽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1.4후퇴때 좌익 쪽에서 살생부 명단을 작성하기도 해 그들도 잘 한 것은 없다고 본다. 내룡리에서 신씨네가 많이 죽은 것은 좌익 쪽에 먼저 맞아 죽은 일이 있었는데 그 여파에 의한 보복살인이 자행된 것으로 보인다. 진짜 좌익으로 활동한 사람은 많이 때리고 쇠고랑을 채워서 끌고 갔으며 이들을 소 오줌이 바닥에 있으면 엎어져 먹고 한 것이 기억이 난다.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떤 사람은 신씨네에 맞아 죽은 것은 아니었는데 우익이 맞아 죽었다는 이유로 보복차원에서 좌익분자들을 희생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당시 실제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은 치안대에서 1차에 다 끌고 갔지만, 신동석씨는 그때 끌려가지 않고 나중에 2차로 끌려갔다. 치안대가 끌고 가려고 하니, 신동석씨 어머니가 차라리 날 죽이라고 매달리자 치안대가 카빈 공포탄을 쏘면서까지 신동석씨를 끌고 간 것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나중에 함께 잡혀갔다가 나온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신동석씨는 북내지서에서도 내가 죄가 없는데 왜 죽느냐며 태연했으며 오히려 다른 사람을 걱정해 줬다고 한다.


치안대와 가까운 사람들은 뒷구멍이라도 빠져 나올 수 있었지만, 신동석씨 가족들도 그가 죽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해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는 북내지서에 있다가 버시고개에 가서 죽였다고 증언한 사람이 있다.


희생 장소는 버시고개 아래 쪽과 고개 넘어 오학 오른쪽 골짜기에서 희생됐다고 한다. 죽을 당시 자기 죽을 구덩이를 직접 파라고 한 다음 총으로 쏴 죽였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총을 맞아 죽는 순간에도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구덩이로 떨어졌다고 한다. 신동석씨를 끌고 간 사람과 총 쏜 사람을 직접 알고 있고 그 사람들로부터 직접 들은 말은 신동석씨는 좌익과 관계없는 사람인데 누명을 쓰게 돼 죽었다고 했다.


총살 후에 가족들은 무서워 그의 시신을 찾으러 가지 못했다. 신동석씨가 북내지서에 있을 때 그 동서가 내복을 갔다 주는 것도 목격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신동석씨가 지서에 있을 때 적극적으로 구명운동을 했으면, 살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 당시 인민군 치하에서 의용군 모집을 할 때 좌익에게 좀 잘못보인 사람들을 여지 없이 의용군으로 끌고 갔다. 일부는 의용군에 끌려갔다가 뒷배경이 있던 사람은 다시 돌아오기도 했다.


본인도 의용군에 끌려 갈 뻔 했는데, 매형 덕분에 의용군에서 빠졌다. 매형이 희생당한 후 누님은 재가를 하고, 아들은 현재 서울에서 살고 있다.


당시 희생당한 사람들 가족은 다 외지로 나가 살게 됐고 매형도 희생당한 이후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다.

 

【자문=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여주시 유족회
참고문헌=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여주지역추모사업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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