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여주>우리는 반동도 빨갱이도 아닌 양민이다②

<여주>우리는 반동도 빨갱이도 아닌 양민이다②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6.10.21 14:05
  • 0
  • 본문 글씨 키우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6.25 전쟁당시 여주지역에서 247명의 민간인이 북한 인민군에게 반동이란 이유로, 남한 군인과 경찰에게 국민보도연맹이라는 이유로 억울하게 희생됐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부의 진심어린 사과와 진실규명을 위한 노력이 없이 지금 우리시대에 잊힌 하나의 작은 사건으로 치부되고 있다.
여주신문은 민간인 학살 사건을 여주시 유족회의 자문과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4번에 걸쳐 기획시리즈로 보도한다.[편집자 주]


-북내면 버시고개 사건


▶전쟁 전 북내면에서는 각 면 대한청년단원들이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 뒤 마을로 돌아와 청년들을 모아 같은 훈련을 시켰다. 장암리에서는 전쟁 전부터 박기섭, 원명희, 원동화, 정태희가 좌익 활동을 했다. 1950년 9월20일 후퇴하는 인민군은 원종학, 원종태 등 8명을 북내면 오학리 장터로 끌고 가 사살해 국군 수복 후인 1950년 9월27일 희생자들의 시신을 모두 수습됐다.


국군 수복 후 북내면에서는 당우리 임모씨, 운촌리 이모씨를 중심으로 치안대가 활동하면서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을 잡아갔다. 치안대에게 잡힌 각 마을 주민들은 북내지서로 이송돼 조사를 받은 후 지서 앞 양곡창고에 감금됐다. 1950년 10월14일 장암리 원긍희는 수확한 담배 잎을 널고 있던 중 치안대에게 끌려갔다.

원긍희는 면 인민위원회에서 호적계 일을 본 것 밖에 없으므로 죽이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피신하지 않았다. 면 인민위원회 서기를 봤던 운촌리 민정식(閔定植)은 국군 수복 직후 치안대의 체포를 피해 강천면 도전리에서 보름정도를 숨어 있다가 부친의 권유로 북내지서에 자수했다. 같은 시기 피신해 있던 운촌리 조용갑은 인민위원회 간부를 했다는 이유로 연행되었으며, 같은 이유로 장암리 원병희, 원명희, 원동화, 원성희, 정준섭, 원긍연, 내룡리 신동석, 운촌리 이만섭, 이종수, 이재영(리 인민위원장)이 북내지서로 끌려갔지만, 구체적인 연행경위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50년 10월29일쯤 북내지서 유치장에 갇혀 있던 주민들 중 대부분이 여주읍으로 가는 길목인 북내면 신남리 버시고개에서 총살됐다. 희생자들은 10여 명씩 묶여 버시고개를 넘어가던 중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버시고개의 인근마을인 신남리는 총살당하는 주민들의 비명소리로 온 동네가 떠들썩했었다고 한다.

 

-여주읍 향교 뒷동산 하리 강변 사건


▶해방 후부터 여주읍에서는 최영래, 오해수를 중심으로 좌익 활동이 활발했다. 최영래와 가까웠던 임은규 등은 당시 활동으로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여러 차례 여주경찰서에 잡혀 간 일이 있으며, 전향한 후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전쟁이 발발하고 1950년 7월1일 여주군 전 지역에서 소집된 보도연맹원 수십여명이 여주읍 얼음창고(현 세종고등학교 옆 강변도로에 있었음)에 갇혀 있다가 교리 건지미 골짜기에서 희생당했다.


인민군 점령 후 여주읍에서도 인민위원회가 구성됐으며, 권효식, 이근현, 임인섭 등이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여주읍에서 행정업무를 보던 박동흥은 피난을 못 간 채 인민군이 여주를 점령한 후에도 하던 일을 계속 하게 됐다. 인민군이 점령하는 동안 여주지역이 폭격을 많이 당했다. 일제강점기부터 의용소방대원으로 활동하던 희생자 임은규는 인민군 점령기 폭격 피해를 복구하는 활동을 계속하게 됐다.


인민군 후퇴시기 여주읍에서는 여주지역의 우익인사 수십 명이 읍내 얼음창고에 갇혀 있다가 앞 강변 모래사장에서 희생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총에 맞고도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는 증언이 있었지만, 그를 찾을 수 없었다. 유엔군이 여주읍을 점령하자 여주군내 일반 행정과 치안 행정 복구가 시작됐다. 복귀한 여주경찰서는 청사가 소실돼 여주국민학교 강당에서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을 연행하고 조사하는 활동을 했다. 부역자명단은 여주경찰서 사찰계에서 작성해 이들의 색출과 연행은 대한청년단 출신 치안대의 협력을 받아 이뤄졌다. 여주읍의 치안대는 이모씨 등을 중심으로 조직돼 활동했으며 총으로 무장하지는 않았다.


여주국민학교운동장에서 20~30명 정도 되는 주민들이 죄수들처럼 쪼그리고 앉아있었고, 그 둘레에 10여 명의 치안대가 보초를 서고 있는 모습이 목격됐다. 1950년 10월11일 여주읍 교리 여주향교 부근에서 총성이 났다. 방공호에는 총살당한 20여 구의 시신이 있었다. 여주경찰서 임시유치시설에 감금돼 있던 주민들이 여주향교 뒷동산 외에 영릉입구 여주보건소 비탈 약수터 주변에서 희생당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묻힐 구덩이를 판 후 그 자리에서 총살당했다.


-점동면, 흥천면 사건


▶점동면에서 박정봉 일가족이 희생되는 사건이 있었다. 현수리 보도연맹원이였던 박정봉은 국군 수복 직후 선발대에 의해 당진리 봉골산에서 살해당했다. 박정봉을 끌고 가던 군인들이 “너는 죽었다. 너는 이제 죽었다.”라며 수류탄으로 박정봉의 머리를 때리는 모습을 목격됐다. 박정봉이 총살된 후 그의 형 박정만과 그의 모친 신삼순이 인민위원장과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점동면 치안대에게 끌려가 당진리 가시랏골에서 총살당했다. 흥천면장 출신 이근덕과 흥천국민학교 교장 성관식이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됐다.


인민군이 흥천면을 점령하자 인민위원회가 구성됐다. 면 인민위원장은 박성기가 역임하고 효지리의 인민위원장은 최봉천(崔鳳天)이었으며 최영락, 이준형이 인민위원회 활동했다. 국군에 의해 여주지역이 수복되자 이기준을 중심으로 흥천면 치안대가 조직돼 인민위원회 등에서 부역하던 주민들을 흥천지서에 감금했다.


흥천지서와 치안대에 의해 부역자라고 판단된 주민들은 흥천지서 부근 야산 구덩이에서 총살됐으며, 부역혐의가 중대하다고 판단한 주민들은 여주경찰서로 이송되었다.

1950년 9월 복대리에서는 김인식을 포함한 7~8명의 주민이 경찰과 치안대에게 끌려갔다. 이들은 복대리 쇠고개 공동묘지(현 흥천공원묘지)에서 총살을 당했으며, 희생자들의 시신은 모두 수습됐다.

발견 당시 희생자는 머리에 총상을 당한 상태였다. 같은 시기 효지리에서는 국군에 의해 효지리 인민위원장 최봉천과 주민 이준형이 끌려가 흥천지서 부근인 효지리 마을 앞산에서 총살됐다. 그 뒤 1950년 11월1일 인민군 점령기에 낙오군인 1명을 희생시켰다는 이유로 효지리 최영락이 먼저 흥천지서로 연행됐다. 그 다음 날 길백인, 최순기, 최한수, 조명구, 지영한, 김종호 등 마을 주민 6명도 연행됐다.

이들은 끌려간 날부터 흥천면 치안대에게 매를 맞았으며, 그 뒤 이천군의 낙오군인 집에 끌려가 다시 매를 맞았다. 그 뒤 이천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돼 한 달 반 동안 취조를 당했다.

최영락은 1950년 12월10일께 최영락이 이천경찰서 유치장에서 먼저 나와 경찰 트럭에 실려 갔는데, 그 뒤로 최영락의 행적이 확인되지 않아 경찰에 의해 살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12월14일 최순기와 김종호가 먼저 풀려났고 이어서 다른 나머지 주민들도 풀려났으나 길백인은 1950년 12월16일 시신으로 발견됐다.


-희생자들의 특징과 숫자


▶희생자 대부분은 인민군 점령기 면(面), 리(里) 인민위원회 간부 또는 이들에게 협조적이라고 의심을 받았던 주민과 그 가족들이다. 이들에게는 전쟁 발발 후 피란 갈 형편이 되지 못했거나 피란 갔다가 돌아와서 인민군 점령기에 어쩔 수 없이 직책을 맡게 된 경우가 많았던 사람들이다.

특히 전쟁 전부터 마을에서 면장, 구장, 교사 등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은 인민군이 점령한 후에도 인민군의 압력 아래 하던 일을 계속 하게 돼 희생된 경우도 많은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재판에 의한 공권력의 집행조차 보복적 성격을 가지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재판에 의하지 않은 공권력의 집행은 잔혹한 결과를 낳았다. 가장 큰 희생대상은 그 가족들이었다. 북내면에서 희생된 오윤석 가족, 능서면에서 희생된 조문환 가족의 경우처럼 미성년자를 포함해 일가족이 몰살된 참혹한 사례가 확인된다.

이 사건에 대한 조사결과 희생자로 확인 추정된 주민들은 98명이다. 그러나 치안대원 등 참고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가남면에서 100여 명, 금사면에서 100여 명, 대신면에서 100여 명, 북내면에서 100여 명(내룡리 30여 명 포함), 여주읍에서 200여 명의 주민들이 희생됐다고 한다. 희생자 수가 98명 이상인 것으로 보이지만, 구체적인 희생자 수를 확인할 수 없었다.

 

【자문=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여주시 유족회
참고문헌=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여주지역추모사업 보고서】

 

저작권자 © 여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