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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래의 6.25 참전 수기-잠들면 죽어! ④

김성래의 6.25 참전 수기-잠들면 죽어! ④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5.06.19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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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래(대신면 율촌리)
■ 제2장 제2국민병으로 남하 하면서...


1·4후퇴가 시작되면서 쉴 새 없이 내려오는 피란민들을 보고 피란할 근심걱정을 했다.


그런데 행정기관으로부터 기이 조직된 제2국민병이란 제도가 있어 20세 전후 젊은 청년들을 먼저 피신시키기 위한 조치로 1950년 12월 ‘제2국민병은 모두 남하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각 부락에서 석별의 정을 나누고 다음날 20일경 대신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하라는 행정기관의 지시에 따라 대신면내 거주하는 각부락 청년들은 전원이 모이다 보니 별의 별 소리가 다 나왔다. 어떤 친구는 이러다가 전투도 못해보고 죽는 것 아니냐하며 당장이라도 입대만 할 수 있다면 지원하여 싸우다나 죽는 것이 좋겠다며 지원 입대를 하려 했지만 이곳에서는 입영 모집이 없어 지원 입대도 못하고 남하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떠들며 인솔자의 지시에 따라 여주군청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남한강을 건널 다리나 배가 없어 북내면 현암리 앞 여울을 이용, 옷을 모두 벗고 얼음같이 찬 물속을 맨몸으로 봇짐은 머리에 이고 건너야 했다.


맨몸으로 추운 겨울에 이강을 어떻게 건너느냐며 공포에 떨고 있는데 연장자 한 사람이 큰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이 강을 건널 때 명심할 것은 남자로서 가장 소중한 낭심(囊心) 즉 불알을 한 손으로 꼭 잡고 건너야 합니다.”


낭심이 물에 덜 닿게, 닿아도 낭심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안전하게 건널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이 때만해도 성에 대하여 민감한 사춘기라 이 말을 듣고 박장대소를 했다. 그러나 이 한 마디가 강과 추위에 대한 공포심을 누그러트릴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의 말이 진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낭심을 쥐고 강을 건넜다. 대다수는 잘 건넜다. 그러나 추위를 이기지 못해 건너다가 쓰러지는 사람이 생겼다. 차디찬 강물에 쓰러지면 죽는다. 쓰러진 자를 일으켜 세우고 어깨를 빌려주며 이끌어주고 밀어주며 건넜다.


정예화된 질서정연한 규율은 아니더라도 제각기 또는 끼리끼리 군청 마당에서 면별로 집합 했다. 모두 모이자 남쪽으로 출발했다.

 

해는 져서 어두워졌다. 목적지는 점동초등학교. 이게 바로 우리들 전쟁의 시작이다. 출발하자마자 눈이 오기 시작하여 목적지에 도착하니 눈이 많이 쌓였다. 저녁으로 주먹밥을 먹고 몇 시간 자고나니 눈이 더 많이 쌓였다. 아침을 먹고 행군을 한다. 행군 중에 왜 그리 눈이 많이 오는지. 시도 때도 없이 눈만 쌓인다. 눈, 눈, 눈….


눈을 맞으며 걷는데 내리는 눈의 정서 때문일까. 이건 군인이 아니다. 원래 제2국민병으로 군인은 아니지만 최소한도의 젊은이들의 대열이란 의미로서의 질서는 무너졌다. 제각각 동아리가 되어 흩어져 남하했다.


인솔자인 방위군 장교도 목적지를 몰랐다. 무조건 남하하는 것이다. 방위군은 군인도 민간인도 아닌 미8군 소속으로 대구에서 창설되었는데 주임무는 미군이 많은 노무자가 필요해, 노무자들을 통제하기 위한 부서로 만든 것이다.


나의 형과 김, 탁,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명이 동아리가 되어 남하하던 중 사람이 많아 잠자리나 끼니를 때우기가 어려울 것 같아 해질 무렵이면 큰길은 피하고 외딴 집을 찾아 숙식을 근근이 해결하면서 내려갔다.
 

문경새재 고개를 넘는다. 해질녘에 웬 진눈깨비가 그리도 많이 오는지, 옷의 겉은 얼고 속은 땀이 나, 걷는 대로 와삭 와삭 소리를 내며 문경새재 고개를 넘었다. 고게 밑에 다다르니 외딴집 몇 채에, 먼저 온 사람들로 초만원이다. 옷은 젖고 방은 없어, 옷도 말리고 추위도 녹이려면 불을 때야 한다. 아궁이에 계속 불을 때니 방에서는 뜨거워 야단이고 밖에서는 추워서 난리다. 인솔하던 방위군 장교는 어디로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인솔하는 재미가 없었거나 춥고 배고파 도망을 했던가 고단해 어디서 골아 떨어졌는지 모른다.


안되겠다. 우리 네 사람은 체면불구하고 안채로 들어가 있는 사정, 없는 사정 털어 놓았다. 학생모를 쓴 우리를 불쌍히 여겼는지 별채를 내어주어 이부자리는 물론 저녁까지 얻어먹는 호사를 누렸다. 그날 일이 지금도 잊혀 지지 않아 문경을 지나칠 때 마다 찾아보았지만 아직도 찾지 못해 아쉽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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