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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명성황후 재조명…시리즈②

<여주> 명성황후 재조명…시리즈②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4.12.17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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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 증거품 히젠도 환수해야 한다”

▲ 명성황후 시해에 사용된 히젠도 복제품

여주신문은 여주에서 태어난 우리나라 국모 명성황후에 대해 3편에 걸쳐 여주시청, 여주문화원, 명성황후 생가 유적관리소, 전문가 등의 자문을 통해 1편 황후의 용안 복원, 2편 명성황후 시해에 사용한 히젠도 환수 필요, 3편 황후 관련단체 등을 게재한다.[편집자 주]


-히젠도를 아시나요?

▶1895년(고종32) 8월20일(양력 10월8일) 새벽 5시30분 미후라 일본공사가 이끄는 일본낭인 30여명, 경찰 10여명, 조선 훈현대, 일본 수비대가 명성황후 침소인 경복궁 건청궁 옥호루에 난입했다. 일본은 작전명 여우사냥으로 전 세계 역사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한 나라의 국모인 황후를 시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은 모든 증거를 없애고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의 우발적인 충돌로 시해된 것으로 조작하기 위해 명성황후를 불로 태워 시신을 유기했다.
 

그러나 참혹한 장면은 미국인 교관 다이장군과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이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일본의 만행이 만천하에 알려지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를 위해 명성황후를 왜곡시키기 시작했다. 명성황후 사인에 대해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시해된 후 불에 태워졌다와 살아 있는 상태에서 불에 태워졌다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일본 후쿠오카 쿠시다 신사에 보관된 히젠도라는 검이 눈길을 끌고 있다. 히젠도란 일본 16세기 에도시대 다다요시(忠吉)란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명검으로 제작당시 전투용이 아니라 사람을 베기 위한 살상용으로 만들어진 검이다.
 

1908년 토오 가쯔아키라는 사람이 신사에 기증했는데 이 사람은 명성황후 시해범 중에 한 명으로 이검이 히젠도이다. 기증된 히젠도는 길이 120cm 칼날 90cm이며 나무로 만든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라고 새겨져 있다. 노호는 늙은 여우로 명성황후를 지칭하는 것으로 황후 시해사건의 결정적인 증거품이다.


 -일본의 만행 세상에 알려져

▶명성황후 시해범인 토오 가쯔아키는 시해사건 이후 가문의 가보로 집에 소중하게 보관했다. 그러나 그는 밤마다 명성황후가 꿈에 나타나 잠을 잘 수 없고 집안에 우안으로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쿠시다 신사에 기증을 했다. 그는 기증을 하면서 ‘이 칼은 절대 세상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고 봉인하고 명성황후 원혼을 달래기 위해 순종을 안고 있는 관음상을 만들었다. 히젠도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혜문스님에 의해서 이다. 그 동안 학자나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만 알고 있었지만 혜문스님이 환수운동을 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5년께 MBC 시사매거진2580과 함께 쿠시다 신사를 방문 처음으로 공개됐다. 그 곳에는 범행 당시 기록인 시해범 데라사키의 편지있는 것도 확인 했다.
 

그 내용은 ‘나카무라 다테오, 토오 가쯔아끼, 나(데라사키) 세사람은 국왕의 제지를 무시하고 왕비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카무라 다테오가 곤녕합(坤寧閤)에 숨어 있던 명성황후를 발견하여 넘어 뜨리고 처음 칼을 대었고, 곧 이어 달려온 토오 가쯔아끼가 두 번째로 칼을 대어 절명시켰다’고 기록돼 있다. 토오 가쯔아끼는 왕비의 침실에 최조로 난입한 3사람 중 하나며 명성황후를 향해 이 칼을 휘둘러 절명시켰던 가장 유력한 사람인 것이다.
 

뒷날 토오 가쯔아끼는 그날의 범행을 참회하고 칼을 신사에 맡기며 당부했다고 한다. 능현동 명성황후 생가 박물관에 히젠도 모조품이 보관돼 있다. 몇 년전 혜문스님이 방문해 이 칼을 보고 “실물은 매우 예리하고 서슬이 퍼런 칼날은 살기가 느껴지고 전쟁용이 아닌 인명을 살상하기 위해 만들어진 칼 이다”라고 말했다.


▲ 명성황후 시해 상상도

-다시 봉인된 히젠도

▶히젠도가 세상밖으로 나오면서 일본의 만행이 온 천하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명성황후 추모사업회 회장인 황선자씨는 2005년 6월 우연한 기회에 일본 후쿠오카를 가게 됐다. 이때 아시아나 항공의 첫 직항로 비행기를 타게 됐는데 공항에 도착하자 일본인들은 첫 손님에게 고개를 숙이고 환대를 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통역사에게 할 말이 있으니 관방청장을 불러 달라고 요구 했다. 명성황후 시해에 대해 사죄와 함께 진상규명에 노력하고 시해사건의 주범인 일왕이 나서야 한다고 했지만 결국 만나지 못했다.
 

다음날 쿠시다 신사를 방문 궁사에게 힌제도를 보여줄 것을 요구 했지만 이들의 거부로 가지고 간 국화 헌화만 했다. 일본은 히젠도 공개할 경우 자신들의 만행이 낱낱이 공개될 것으로 우려해 지금까지도 공개를 하지 않고 있다. 최근 히젠도 환수위원회 관계자가 신사를 방문 히젠도를 공개를 강하게 요구하자 일본 경찰이 출동 체포되는 일도 있었다.
 

한국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한국에 관한 모든 것을 알려주는 사이버 관광 가이드이자 사이버 외교사절단인 반크(Vank)에서는 세계 30여개국 정상들에게 독도, 위안부, 명성황후 시해 진상규명을 위해 서진을 전달하기도 했다.


-올바른 역사를 위해 환수 필요

▶일본은 1909년 하얼빈에서 명성황후 시해에 대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총을 보관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 중의 하나가 ‘남의 나라 황후를 살해한 죄’를 처단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이유로 일본인들이 볼 때 범죄용 증거품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히젠도는 우리나라 국모를 살해한 흉기이며 올바른 역사를 알기 위해 우리가 환수를 해야 한다. 일본은 자신들의 합리화를 위해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에는 고종과 순종실록이 누락돼 있다. 이는 일본 구마모토대학교 교수인 기쿠기 겐조가 실록편찬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왜곡을 시켰기 때문에 유네스코는 이부분을 제외시켰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명성황후를 민비라고 왜곡하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거쳐였던 나고야 성 박물관에도 민비로 표기돼 있다.
 

2007년 일본에서는 명성황후 시해 사죄를 위해 사절단이 여주를 방문했다. 그러나 이들은 낭인들의 후손으로 우리나라가 발전하면서 강대국이 될 경우 자신들의 만행이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해 겉으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황선자 회장은 “진정한 사죄는 일본 정부와 일왕이 해야한다”며 “후손에게 사실을 알려 언제가는 꼭 사죄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 처음 공개된 명성황후 장례식 사진

-명성황후 국장 희귀사진 발견

▶명성황후(1851~1895) 국장 사진 3장과 시해 후 처음 묻힌 곳으로 추정되는 사진 1장이 발견됐다. 양상현 순천향대 건축과 교수가 미국 럿거스대 도서관에 소장된 그리피스 컬렉션의 한국 관련 사진 자료에서 명성황후 국장 사진을 발견, 8일 공개했다. 명성황후 국장 당시의 현장 사진 가운데 경운궁 대안문(大安門)을 나서는 명성황후 장례 행렬의 모습이 주목된다. 이 사진의 뒷면에 그리피스는 ‘황후의 운구 장면’이라고 적었다.
 

양 교수는 “이와 유사한 내용의 사진이 소개된 적이 있으나 이렇게 가까이에서 촬영된 사진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며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에 수록된 ‘발인반차도(發靷班次圖)’와 비교하면 사진 속 가마는 명성황후의 재궁을 모신 ‘대여(大轝)’가 아니라 좁은 길을 지날 때 관을 모시는 ‘견여(肩轝)’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장례 행렬에서 중앙의 가마가 보이는 장면은 명성황후의 위패를 모신 가마이거나 혹은 황후가 생전에 타던 가마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검은 바지와 흰색 상의를 입고 칼을 차고 가마를 호위하는 신식 군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주위의 건물과 배경을 살펴보면 장례 행렬은 이제 막 운종가를 지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양 교수는 전했다.

【자문=여주문화원 조성문 사무국장, 명황황후생가 관리소, 명성황후 시해사건 진상규명위원회 황선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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