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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4.03.28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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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신 - 61

▲ 조성문(여주문화원 사무국장)
1783년(정조7) 7월10일. 춘당대 추도기(秋到記) 시험에서 여주출신 생원 한상신이 수석을 차지했다. 두 달 뒤인 9월18일 한상신은 정시문과의 전시(殿試)에서 또 장원을 하였다.
 

한상신(韓商新 1758-1794)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덕여(德汝). 윤휴, 송시열(宋時烈)등과 교유가 깊었던 여주사람 한여해(韓如海)의 5대손이다.
 

경전을 연구하여 성리학에 밝았고 일찍이 문장을 이루었다. 1780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문과급제한 후 강제문신(講製文臣)으로 초계(抄啓)되었으며 임금의 교서를 작성하는 지제교로 선발되었다.
 

1785년 11월24일 지평으로 있던 한상신이 ①임금은 잠시의 기거(起居)나 심상한 일에도 몸소 바르게 실천하여 세자가 우러러 본받게 할 것 ②사람의 임용은 지벌(地閥)의 고하와 문장의 우열에만 의존하지 말고 재주있는 한미한 족속(族屬)에게도 기회를 줄 것 ③임금에게 관계되는 일이라도 머뭇거리지 말고 지적할 수 있는 바른 언로(言路)를 열 것 등을 아뢰어 정조의 칭찬을 들었다. “그대가 대직(臺職)에 새로이 들어온 초기에 언사(言事)의 상소를 해냈으니 나는 매우 그대를 칭찬한다.” 1792년 9월 이가환(李家煥)이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자 반대상소가 잇따랐다. 한상신도 상소를 올려 거들었다. “이가환은 지친(至親)에게 허물이 있으니 화현(華顯)의 대열에 두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게다가 간장(諫長)으로 천망되었으나 사람들의 말만 무성해질 것입니다. 전하의 이 명은 혹여 격성(激成)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격성은 중용(中庸)의 도가 아니니 밝으신 전하께서 어찌 이처럼 중용을 벗어난 일을 하시겠습니까마는 일과 때가 서로 가까워 이 혐의가 없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가환의 지친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둘째 형 이잠(李潛)을 가리킨다.
 

1706년(숙종 32) 9월17일 남인(南人)인 이잠이 노론(老論)의 핵심부를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지난 무진년(숙종14 1688)에 원자(뒤에 경종)가 탄생하였으므로 장자를 세운다는 춘추(春秋)의 의리를 좇아 예로서 유교(諭敎)를 거행함에 다하지 않음이 없어야 할 것인데 스스로 선비라는 송시열(송시열은 이때 이미 죽었음)이 걸핏하면 춘추의 의리를 인용하면서 오히려 여기에 대하여 우선 천천히 하자는 말을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김춘택(金春澤)을 죽이지 않고 이이명을 귀양보내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지 않을런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노론의 손아귀에 있었다. 곧 친국이 벌어졌고 4일 만에 이잠은 형신을 받던 도중에 죽었다. 80여년 전의 이 일이 당(黨)이 다르다는 이유하나로 그 후손의 벼슬길에 걸림돌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정조를 분노케한 대목은 중용을 벗어났다는 한상신의 지적에 있었다. “나는 사서(四書) 중에서 중용을 가장 많이 공부했다. 입과 귀로만 배워 심신(心神)공부에 도움이 없다고는 하겠으나 오직 제20장의 경대신(敬大臣)의 뜻만큼은 나름대로 반복해서 연구하여 그 무한한 의미를 홀로 깨달았고 중용에서 취해 쓰는 것이 오직 이 한 귀절에 있다할 것이다.” “침전에다 특별히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편액을 달고 정구팔황(庭衢八荒) 네글자를 크게 써서 여덟 개의 창문에다 죽 걸어 두고는 아침 저녁 눈여겨 보면서 나의 끝없는 교훈으로 삼아오고 있다. 그리하여 한미한 집안의 누더기를 걸친 자들을 초야에서 뽑아 올렸는데 가환은 그 가운데 한사람인 것이다.” “이가환의 종조(從祖)에 대해서는 나도 그 이름을 익히 듣고 있으나 종조는 종조이고 종손은 종손이다. 재능을 헤아려 임무를 맡겼는데 이가환이 문사(文士)가 아니라는 말인가.” 라며 분노하던 정조는 마침내 한상신을 평안도 옥강(玉江) 만호로 내쳤다. 이후 실록에서 한상신의 자취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청주 한씨 문정공파(文靖公派) 학행록에 한상신이 36세에 죽으니 시론(時論)이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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