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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3.09.27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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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휴 - 38

   
▲ 조성문(여주문화원 사무국장)
백호 윤휴는 아버지의 고향인 여주에서 오래 살았다.
 

윤휴(尹鑴 1617-1680) 본관은 남원(南原), 초명은 경(鍞), 자는 희중(希仲). 25세 때 휴(鑴)로 이름을 고쳤다. 호는 백호(白湖), 하헌(夏軒). 대사헌 효전(孝全)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 김덕민(金德民)의 딸이다.
 

윤휴는 3살 때 경주부윤으로 있던 아버지가 별세하자 여주 선산에다 장례를 치루고 잠시 서울에 올라와 살았으나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난 8세 때 다시 여주로 피난왔다. 정묘, 병자호란 때는 외가가 있는 보은(報恩) 삼산(三山)에 머무르면서 외조부 간서재(澗西齋) 김덕민으로 부터 글을 배웠다. 총기가 있어서 한자를 가르치면 열자를 깨우쳤고 불과 2년만에 경서를 외워 간서재를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28세 때 다시 여주로 옮겨와 금사면 백호(白湖) 옆에 자리를 잡으니 그의 호는 이에서 연유한다. 이로부터 10여년 간 그는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하여 유교의 경전인 중용, 대학, 효경 등에 독자적인 해석을 가할 수 있게 되었고 장구(章句)와 주(註)를 수정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그의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남인들이 정권을 잡고 있던 숙종 2년에 비로소 윤휴는 정4품인 성균관사업의 직을 받고 출사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함락되자 “지금 이후로는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을 것이오. 혹시 정치를 하게 된다면 결코 오늘의 치욕을 잊지 않을 것이오”라고 맹세한지 38년 만에 벼슬길에 나간 것이다. 윤휴를 벼슬길로 이끈 것은 북벌에 대한 꿈이었다. 윤휴는 북벌을 실행하려면 백성들의 자발적인 호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지패법(紙牌法)을 시행하여 양반과 양민, 천민 등의 신분적차별을 없애고 호포법(戶布法)을 통해 누구나 군역을 담당토록 하며, 오가작통제(五家作統制)와 상평제(常平制)를 실시하여 마을공동체를 이루어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자 하였다.
 

또한 전차(戰車)를 제작하여 청나라의 기병전술에 대응하고 만과(萬科)를 시행하여 무예가 출중한 무사와 장정을 뽑아 정예군사력을 증강시키며 전시 군사사령부인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의 설치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기득권 박탈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서인(西人)은 물론 같은 남인(南人)의 일부가 윤휴의 주장에 반대하였고 임금마저 급진적인 윤휴의 생각에 부담을 느껴 총애를 거두었다. 1680년(숙종 6), 마침내 서인들이 주도하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나자 윤휴는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5월20일에 사사되었다. 이후 숙종 15년에 아들 하제(夏濟)의 신원(伸寃)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나 추탈과 복권을 거듭하다 1908년에야 관작이 회복되었다.
 

학문과 인품이 고매하였던 까닭에 당시의 일류 명인들이 윤휴와 교분을 가졌다. 민유중(閔維重)은 “윤휴의 기모를 보면 좌상춘풍(左上春風)이요 그 언론을 들으면 경전에 출입하고 금고(今古)를 관천(貫穿)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하여 귀 기울이게 하니 어찌 경도치 않으리요” 하면서 상찬해 마지않았고 라이벌인 송시열(宋時烈)도 “위로는 대신으로부터 아래로는 위포(韋布)에 이르기까지 윤휴의 학문이 풍미하여 주자(朱子)를 능가할 정도다”라고 탄복하였다. 기해예송(己亥禮訟)이 일어나기 전까지 윤휴와 송시열은 친한 사이였다. 우암이 자주 윤휴의 집에 드나들던 어느 날 우암의 관상을 본 윤휴의 어머니는 “그 사람은 높은 곳을 바라볼 때 눈가에 질투심이 나타나니 뜻이 순조롭지 않을 것이며 마음 속에 심술이 있어 어질지 못할 것이니 깊이 사귀지 말아라.” 고 경계하였으나 윤휴는 “우암은 큰 선비인데 그럴 리가 없습니다.”라며 계속 교우하다 훗날 큰 화를 자초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朱子)만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인가. 주자가 살아온다면 나의 학설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공자(孔子)가 살아온다면 나의 학설이 맞다고 할 것이다.”라고 뚜렷한 자기신념을 가졌던 윤휴가 사약을 마시면서 명언(名言)을 남겼다. “나라에서 유학자가 싫으면 쓰지 않으면 그만이지 죽일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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