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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茶)문화의 유적 신륵사

차 (茶)문화의 유적 신륵사

  • 기자명 편집국
  • 입력 2004.11.15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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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는 신라때 세워진 사찰로도 유명하지만 고려말 나옹 혜근스님에 의해 차 문화를 이루었던 곳으로도 이름이 있어 그 유래를 찾아 소개한다』 - 신륵사에는 차(茶) 한잔으로 법을 가르친 나옹 혜근 스님의 흔적이 남아있다.- 신륵사의 동대(東臺)에 올라서면 신라때 세워진 7층 벽돌탑(벽돌탑으로 인해 신륵사를 일명 ‘벽절’이라고도 함)이 우뚝 서 있고, 그 남쪽 절벽 아래로 남한강이 유유히 흐른다. 7층 벽돌탑 아래 절벽 끝 팔각정자 강월헌(江月軒) 왼편에 3층석탑이 있는데 바로 이 탑자리가 고려 말 인도와 중국의 조사선맥을 이어와 부패한 고려불교를 일으켜 세우려다 간 나옹 혜근(懶翁 慧勤·1320∼1376) 스님이 입적하고 다비 (茶毗 : 화장) 한 자리이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 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이 유명한 시는 나옹 스님의 시로 스님은 차와 선(禪), 차삼매(茶三昧) 선삼매(禪三昧) 차선일여(茶禪一如)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간 차인(茶人) 이었다. 인도 108대 조사인 중국의 지공선사(指空禪師)로부터 한 잔의 차로 비법을 전해 받았다. 지공선사 뿐만 아니라 중국 임제종의 종통을 이어 일문을 이루고 있던 평산선사(平山禪師)로부터 인가를 받고 돌아와 차 한잔으로 제자들을 가르친 거목이었다. 고려 공민왕은 나옹스님을 개경(지금의 개성)으로 불러 왕사로 봉하고(1371년) 조계종사의 자격으로 송광사에 주석케 한다. 그러나 스승인 지공선사가 입적하고 그의 정골 사리 및 가사를 나옹에게 전하라는 유지를 남겼다는 소식과 함께 그 유물을 전해받은 나옹 스님은 곧 회암사로 돌아와, 회암사터가 인도의 나란다사와 방불하니 그에 맞먹는 대가람을 건립하고 싶다던 스승 지공의 뜻을 이루기 위해 공민왕 21년 (1372년)부터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일으킨다. 우왕 2년(1376년)에 260여 칸의 대규모 사원으로 확장시키고 그해 4월 초파일에 낙성회를 가지니, 서울과 지방의 선비와 아낙네들이 밤낮으로 왕래하여 생업을 폐지할 지경이었다. 시기하는 무리들이 이를 막으려 함에 나옹을 경남 밀양 영원사로 강제 이주시키는 왕명을 내린다. 스님은 회암사를 떠나 한강을 거슬러 오르다가 그 제자들이 살고있는 여주 신륵사에서 발길을 멈추고 5월15일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강가바위 언덕에 앉아 세상과의 인연을 끊는다. 입적을 한 그 바위에 다비를 하고 기념탑을 세운 것이 지금의 차 문화 유적지가 된 것이다. 지금도 신륵사 조사당에는 나옹 스님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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