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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3.05.31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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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옥(尹玉)- 24

   
▲ 조성문(여주문화원 사무국장)
조선중기에 또 한명의 여주출신 왕비가 등장할 뻔 했다.
 

조선 13대 임금 명종은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와의 사이에 단 한명의 아들을 두었었는데 그가 순회세자(順懷世子)였다.
 

순회세자는 1561년 7월21일 1살 위인 호군(護軍) 윤옥의 둘째딸과 결혼했으나 1563년 13세에 죽었다. 혼자 남은 세자빈인 공회빈(恭懷嬪) 윤씨는 시어머니 인순왕후의 유명(遺命)으로 동궁(東宮)에서 거처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인 1592년에 41세를 일기로 죽었다. 공회빈은 성품이 정결하였고 종신토록 상(喪)중에 있는 것처럼 하였으며 친척들의 궁궐출입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평생 불행한 삶을 살았던 공회빈은 죽어서도 편안치 못했다. 궁중상례에 따라 공회빈의 시신을 순회세자가 묻혀있는 순창원(順昌園)에 부장(附葬)하려던 중 왜군들이 한양 가까이 쳐들어오게 되자 선조임금은 급히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 와중에 몇몇 관원들과 공회빈의 친족들이 빈소 후원에 임시로 시신을 묻었으나 왜적들이 파내어 불태웠다고 한다. 이후 공회빈의 영혼은 안주할 곳을 잃고 떠돌 수 밖에 없었는데 1601년 4월25일 선조의 명으로 공회빈과 순회세자의 신주(神主)가 세워지고 제사를 거행하게 되었다. 이 비운의 딸을 둔 아버지가 윤옥이다.
 

윤옥(尹玉 1511∼1584)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자온(子溫). 호는 동리(東里). 판서 윤사익(尹思翼)의 아들이며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외할아버지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있어 4세에는 능히 글을 읽을 수 있었고 커서는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에게서 배워 1531년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154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각 조의 좌랑, 정언, 수찬과 사헌부의 지평, 헌납, 장령 그리고 직제학, 동부승지를 지냈다. 1553년 이후 남양·수원·인천부사, 양주·해주목사, 한성부좌윤을 거쳐 동지돈녕부사, 동지중추오위도총부 부총관으로 재직하다 죽었다. 임금은 세자빈의 아버지라 하여 특별히 우의정에 증직하였다.
 

윤옥은 부모를 지성으로 섬겨 살림을 따로 낸 뒤에나 공무(公務)가 항상 바쁜 중에도 정성(定省)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상(喪)을 당해서는 슬피 호곡하여 서러움이 좌우를 움직였다. 벼슬길에서는 청근(淸謹)으로 일관하여 고인(古人)에게 부끄러움이 없을 지경이었다. 세속에서 좋아하는 바는 마음에 거들떠보지도 않고 책을 탐하고 학문을 즐겨 낮이나 밤이나 손에서는 책이 떠나지 않았으며 남에게서 얻은 바를 미루어 부지런히 후진(後進)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니 책을 들고 물으려고 찾아온 사람이 뒤를 이었다. 몸이 재상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능히 궁약(窮約)으로 자신을 유지하여 검박하기가 한사(寒士)와 같았다.
 

윤옥이 죽은 후에 사람들이 그 곳간을 열어보니 남은 재물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의복도 쓸 만한 것이 없었는데 그런 뒤에 사람들이 더욱 그의 청렴을 믿게 되었다. 병으로 누웠을 때 순순(諄諄)히 마치 잠꼬대처럼 말을 하였으나 오직 국사(國事)를 걱정하는 일과 제사를 받들고 자질(子姪)들을 경계하는 일 이외에는 한 마디도 집안일에는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그에게도 약간의 흠이 있었다. 윤옥(尹玉)이 사은사로 북경에 들어갈 때 김효원(金孝元)이 서장관(書狀官)이 되었는데, 김효원은 곧 윤옥의 동리(同里) 소년이었다. 윤옥의 처음 생각에는 김효원이 자세히 따지지 않을 터이므로 자기의 욕심을 달성시킬 수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출발한 날로부터 윤옥의 남행(濫行)을 옆에서 하나도 따라 주지 않았다. 윤옥의 자제(子弟)들이 싸 보낸 많은 은냥(銀兩)은 다 윤가(尹家)의 부탁에 의하여 궁중에서 유출된 것이었는데, 김효원의 행동을 보고 그 욕심을 달성시키지 못할 줄 알고는 중도에서 되돌려 보냈다. 이 때문에 윤옥에게 원한을 산 것이 컸고 궁중에서 참소를 많이 입었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묘는 대신면 보통리(甫通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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