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라파국(歐羅巴國 유럽)은 또한 대서국(大西國. 중국에서 유럽을 이르던 말)이라고도 불린다. 이마두(利瑪竇 마테오 리치 Matteo Ricci)라는 이가 있는데, 배를 타고 8년간 항해하여 8만 리의 풍파를 넘어, *동월(東粤 광동성 동부지역)에 10여 년간 거주했다. 그가 저술한 『천주실의(天主實義)』 두 권은 다음과 같다. 첫째, 천주(天主)가 천지를 창조하고 주재하며 돌보는 도리. 둘째,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여 짐승과 크게 다르다는 점. 셋째, 윤회 육도의 오류를 분별하고, 천당과 지옥의 선악에 대한 보응. 마지막으로, 인간의 본성이 본래 선하여 천주를 공경하고 받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나라 풍속에서는 군주를 교화황(敎化皇)이라 부르며, 결혼을 하지 않으므로 계승할 후사(後嗣)가 없고, 현명한 사람을 택하여 세운다. 또 그 풍속은 우의(友誼)를 중시하여 사사로이 재물을 모으지 않고, 우정론(友論)을 저술했다. *초횡(焦竑)이 말하기를, 서역의 이군(利君, 마테오 리치)은 벗을 두 번째 자신으로 여긴다고 하였으니, 이 말이 매우 기이하다”고 하였다. 상세한 내용은 *속이담《續耳譚》에 보인다.』
歐羅巴國。亦名大西國。有利瑪竇者。泛海八年。越八萬里風濤。居東粤十餘年。所著天主實義二卷。首論天主始制天地。主宰安養之道。次論人魂不滅。大異禽獸。次辨輪廻六道之謬。天堂地獄善惡之報。末論人性本善而敬奉天主之意。其俗謂君曰敎化皇。不婚娶故無襲嗣。擇賢而立之。又其俗重友誼。不爲私蓄。著重友論。焦竑曰。西域利君以爲友者第二我。此言奇甚云。事詳見續耳譚。-이수광(李睟光, 1563-1628), 지봉유설(芝峰類設), 1614년
*동월(東粤): 명청대(明淸代)는 광동성(廣東省)을 ‘월(粤)’이라고 했다. 동월은 주로 중국 광동성) 동부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여기에는 현재의 조주(潮州), 산터우(汕头), 지양(揭阳), 산웨이(汕尾), 메이저우(梅州)와 같은 도시들이 포함된다.
*초횡(焦竑 1541~1620): 명대 중후기의 유명한 학자로 자(字)는 약후(弱候)이다. 강소성(江蘇省) 강녕(江寧, 지금의 남경南京)에서 태어나, 1589년 전시(殿試)에서 장원을 하여 한림원(翰林院) 수찬(修撰)이 되었다.
*속이담《續耳譚》: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저술한 《교우론(交友論)》의 한 부분.
당시 조선에서는 생소했던 서학(西學)을 최초로 소개했던 저술로도 유명한 『지봉유설 芝峰類設』은 이수광이 1614년(광해군 6)에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다. 그의 아들 성구와 민구에 의하여 1634년(인조 12)에 출간되었다.
이수광이 살았던 시기는 임진왜란(1592~1598년)과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명나라를 따르고(親明), 후금(훗날 청나라)을 배척하는(排金)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으로, 후금(청나라)이 조선을 침공하는 정묘호란(1627년)이 발발했던 때다.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에서 종군하기도 했던 그는 전쟁의 참상 속에 선비로서의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을 것이다.
『지봉유설』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서구 문명을 소개한 것이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소개하면서 천주교의 교리와 교황에 관하여도 기술하고 있다.
이수광은 명나라에 세 번 다녀와 서양문물을 접하면서 수십 년간 모은 방대한 자료를 광해군 때 벼슬에 물러나 있을 때, 한백겸(韓百謙 1552~1615)의 권유로 1614년 최초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을 편찬하게 된다고 전하기도 한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의 여러 항목에서 한백겸의 학설이나 견해를 인용하거나 언급하여, 두 학자 사이에 학문적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한백겸이 제시한 고증학적 연구 결과인 기자의 정전제(井田制) 유적에 관한 *‘기전유제설’이나 삼한(三韓)의 위치 비정에 대한 견해 등을 『지봉유설』에 소개하고 있다.
또 한백겸의 문집 『기창유고』(箕窓遺稿)와 다른 기록들을 통해서도 교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수광은 한백겸이 사망했을 때 그를 추모하는 만사(挽詞)를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단순한 지인을 넘어선 깊은 친분 관계를 시사한다.
구암 한백겸 묘 및 신도비(久菴韓百謙墓및神道碑)는 경기도기념물 제165호로 경기 여주시 강천면 가마섬길 43(부평리 481-1)에 있으며, 앞서 소개했던 여주시 강천면 부평리 581번지의 천주고 초기 신학교인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와 약 2Km 떨어져 있으니, 역사로 이어진 인연이 놀랍기만 하다.
「기전유제설(箕田遺制說)」과 「기전도(箕田圖)」는 1607년(선조 40) 호조참의로 있을 때, 평양성 밖의 기자유전(箕子遺田)을 보고, 은나라 제도에서는 전자형(田字形)의 전제(田制)를 썼을 것이라고 설명한 내용이다. 여기에 유근(柳根)·허성(許筬)의 「기전도설발(箕田圖說跋)」과 「기전도설후어(箕田圖說後語)」가 함께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이론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찬동을 얻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글은 그 뒤 유형원(柳馨遠)의 정전론(井田論)을 비롯한 실학자들의 전제에 관한 이론에 미친 영향이 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5900
□ 불교사찰 주어사에서 다양한 사상이 만나다
여주는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이른바 ‘천주교 성지’가 여럿 있는 곳이다.
특히 이번에 소개하는 여주시 산북면 주어리 주어사(走魚寺)는 불교사찰로, 18세기 조선 시대에 유학자들이 이곳에서 강학을 하면서 스스로 천주교를 종교로 받아들이는 세계 교회사에서 유래없는 곳으로 의미가 있다.
여주 주어사는 녹암 권철신이 정약전 등 제자와 함께 머물면서 강학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강학 때 유학 서적뿐만 아니라 천주교 서적도 함께 연구하여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주어사는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으로 일찍부터 교회와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여주 주어사지, (재)불교문화유산연구소 학술총서 제76책, 2025. 150쪽
한국 천주교의 역사가 시작된 장소로 주어사를 꼽는 것은 18세기 후반 권철신(權哲身 1736~1801)이 매년 사찰에 모여 강학(학문을 연구하는 모임)을 열고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두루 다뤘는데, 특히 1779년 주어사 강학에서 서학을 연구하고 토론한 학자들 중 일부가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면서 1784년 한국교회 최초로 세례를 받은 천주교인인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의 세례와 신앙 공동체의 설립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 강학과 관련한 기록은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작성한 권철신과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의 묘지명, 샤를르 달레 신부(Claude-Charles Dallet, 1829~1878)가 가 1874년 쓴 「한국천주교회사」 등에 나타난다.
『강학이 열린 장소를 두고서도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어 왔는데, 권철신의 묘지명에는 “천진암 주어사”, 정약전의 묘지명은 “주어사”, 달레의 책에는 “외딴 절”이라고 각각 다르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다수의 연구자들은 1779년에 열린 강학이 주어사에서 열린 것으로 보고 있다.
권철신의 묘지명과 정약전의 묘지명에 모두 ‘주어사’가 나온다는 점, 그리고 달레의 기록에서 “이벽이 강학 장소를 찾았을 때, 예상과는 달리 강학의 장소가 변경되어 있었다”고 한 내용에 주목해서다. 다른 사료를 보면, 이벽은 이전에도 천진암에서 공부를 한 적이 있으므로 혼자서 천진암을 찾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달레의 기록에서 이벽이 스님들의 도움을 받아 강학 장소를 찾아갔다는 것은 강학이 열린 곳이 천진암이 아닌 다른 장소라는 뜻이다.』 -역사 자료를 통한 ‘주어사 강학’의 재구성,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s://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275
정약용의 연보를 보면 「1779년(정조 3, 18세) 진주공의 명으로 공령문(功令文)을 공부했고, 성균관에서 시행하는 승보시(陞補試)에 선발되었다. 손암 정약전이 녹암 권철신을 스스로 모셨는데, 기해년(녹암 44세, 손암 22세, 다산 18세) 겨울 천진암(天眞庵) 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회를 열었다. 눈 속에 이벽(李蘗 1754~1785)이 밤중에 찾아와 촛불을 켜놓고 경전에 대한 토론을 밤새며 했는데, 그 후 7년이 지나 서학에 대한 비방이 생겨, 그처럼 좋은 강학회가 다시 열릴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고 되어 있다.
현재 주소로 경기 여주시 산북면 주어리 산106번지 앵자봉 자락 해발 365~400m에 있었던 주어사는 현재 그 터만 남아 있지만, 억불 정책이 시행된 조선시대에 유학자들이 불교 사찰에서 유학과 서학(西學)이라고 불리던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여 신앙으로 발전한 곳이다.
지난 2023년 12월 5일 불교역사제자리찾기운동본부가 전국비구니회 메따공연장에서 연 ‘주어사지 보존 관리방안’ 세미나에서 김용태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는 「“조선불교사의 관점에서 볼 때 주어사에서 었었던 강학이 유교 경서를 대상으로 한 사상 담론이었건, 천주 교리를 공부했던 간에 불교의 사상적 포용력을 보여주는 장면이다”며 “주어사와 천진암은 여주 지역 지식인들의 독서 및 토론 공간이었고 불교 뿐 아니라 유교, 천주교 등 다양한 사상 조류가 교차하며 조선의 사상과 문화의 꽃을 활짝 피웠다.”고 강조했다.」 - 불교신문 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408801
□ 주어사 강학의 서학이 천주교로
1779년 주어사에서 열린 겨울 강학에는 김원성(金源星, 1758~1813), 권상학(權相學, 1761~?), 이총억,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이 참석했고, 뒤늦게 이벽(李檗, 1754~1785)이 합류했다.
주어사 강학에 참여한 김원성은 권철신의 누이 안동 권씨의 사위이고, 권상학(權相學 1761~?)은 아우 권일신(權日身 권일신(權日身 1751~1791)의 장남이며, 이총억(李寵億 1764~)은 이기양의 맏아들이자 권철신의 사위였다. 정약전은 권철신의 제자였고, 이벽은 정약전의 형 정약현의 처남이면서 권철신과 같은 이병휴(李秉休 1710∼1776)의 문하였다.
1783년 겨울에 이승훈의 아버지 이동욱(李東郁 1739~?)이 사은겸동지사(謝恩兼冬至使 조선시대에 동지 때 명나라나 청나라에 보낸 사신)의 서장관(書狀官 외교사절단의 지휘부 삼사신(三使臣 가운데 한 관직)이 되어 북경으로 가게된 때 이승훈도 함께 가게 되었다.
이벽은 이승훈에게 북경에서 천주교를 배우고 각종 서적을 얻어가지고 오라고 부탁한다.
이승훈은 북경에서 필담으로 교리를 배웠는데, 결국 자진하여 세례 받기를 청하였다. 1784년 음력 1월 이승훈은 그라몽(Jean de Grammont, 梁棟材)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조선 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뜻에서 베드로(반석)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당시 북경에 있던 서구 선교사들은 이 사건을 매우 놀라와했다. 선교사가 가서 찾아보지도 않은 나라의 젊은 청년이 자진하여 찾아와 세례를 받고 천주교인이 된 사례는 로마 카톨릭 사상 유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선교가 아닌 구도(求道)에 의해서 한국 최초의 세례 교인이 된 이승훈은 1784년(정조 8년) 4월 13일(음력 3월 24일) 기하학, 각종 과학서적, 성서, 천주교 자료, 성상·묵주 등을 가지고 한양에 돌아왔다.
1784년 귀국한 이승훈(李承薰)이 이벽(李檗)·권일신(權日身) 등과 명례동(明禮洞 서울 명동)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집회를 가져오다가 다음해 3월, 도박단속을 위하여 순라하던 포졸들에게 적발되었다.
이때 교인들은 이승훈, 정약전(丁若銓)·약종(若鍾)·약용(若鏞) 삼형제, 권일신 부자 등 10여명으로 이벽의 교설(敎說)을 듣고 있다가 체포되어 모두 형조로 끌려갔다.
그러나 형조판서 김화진(金華鎭 1728~1803)은 이들을 석방하고, 김범우만 투옥하였다. 이때, 권일신은 이윤하(李潤夏)·이총억(李寵億)·정섭(鄭涉) 등 다섯 사람과 함께 형조에 들어가 압수한 성상(聖像)을 돌려달라고 교섭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이것을 계기로 이용서(李龍舒) 등 유생들이 척사상소(斥邪上疏)를 올려 그들을 처벌하도록 여론을 일으켰으나, 성학(聖學 유학儒學)이 흥하면 사학(邪學)은 자멸할 것이라고 믿고 있던 정조는 역관으로 중인(中人) 신분인 김범우만을 경상도 밀양의 단장(丹場)으로 유배시켰다.
1784년에 이벽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이승훈(李承薰)으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가족과 중인, 양반들에게 천주교를 열심히 전교하던 그는 1786년에 유배지인 밀양에서 고문 받은 상처가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을사추조적발 당시 주어사에 함께 있었던 세 사람 중 권상학과 이총억은 천주학에 깊이 연관되어 있었고, 김원성은 그 반대의 자리인 척사의 길에 들어서 있었다.
□ 천주교 밀사 여주 출신 윤유일
여주시 산북면 주어사 터로 가기 위해 여주시 대신면 천서리에서 이포대교를 건너 오른쪽 길로 산북면 주어리 쪽으로 가는 길에는 금사면 금사2리 마을이 있다 이 마을 입구 작은 표지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윤유일 바오로와 윤유오 야고보 형제’, 여주 점뜰(금사면 금사2리) 마을은 주문모 신부님을 입국시킨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밀사 윤유일 바오로 순교자와 그의 아우 윤유오 야고보 순교자의 고향입니다. 조선 천주교회는 윤유일 바오로의 노력으로 명실공히 성직자와 신자가 함께하는 교회의 본 모습을 찾게 됩니다. 천주교 양근성지』
즉 윤유일(1760~1795년)의 노력으로 조선 천주교회가 성직자와 신자가 함께하는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돌아온 후 이승훈(李承薰)·권일신 등이 가성직(假聖職) 제도를 만들어 교회 활동을 하다가 북경주교에게 교회법상의 유권해석을 구하기 위해 1789년 밀사를 보낼 계획을 세웠다. 이때 선택된 사람이 경기도 여주 출생 윤유일(尹有一 1760~1795)이다.
지금의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금사2리에서 태어난 윤유일은 권철신(權哲身)·권일신(權日身) 형제가 사는 한감개(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사하여 권철신에게 학문을 배우는 가운데 권일신을 통해 천주교인이 됐다.
북경에 간 윤유일은 조건 영세와 성체성사 및 견진성사를 받았으며, 그가 가져온 회답에 따라 조선교회는 가성직 제도를 해체하고 성직자 영입운동을 펴나가게 된다.
이에 따라 1790년 윤유일은 또 다시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는 밀사로 북경에 들어가 파견약속을 받고 돌아왔다.
이 때 윤유일이 조상에 대한 제사가 천주교에서 금지되고 있다는 것을 신자들에게 알려줌으로써 신자들의 커다란 동요를 일으켰다. 1792년 세번째로 북경교회에 들어가 선교사 파견을 재요청하여, 1794년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할 때에는 지황(池潢) 등과 함께 안내를 맡아 한양으로 잠입시켰다.
1795년 주문모 신부를 체포하려다 놓친 ‘을묘실포사건’이 발생하면서, 집주인인 최인길(崔仁吉)을 비롯하여 입국에 도움을 준 윤유일과 지황도 체포되었다. 이들은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다가, 체포된 다음날인 6월 28일에 순교했다.
윤유오(?~1801)는 일찍부터 형 윤유일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웃에 교리를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형이 순교한 뒤에는, 인근에 사는 조동섬(유스티노), 권상문(세바스티아노) 등과 만나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하면서 신심을 북돋우었다. 또 1795년 초,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지방 순회에 나서 양근에 도착하였을 때 그를 만나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1801년에는 신유박해가 일어나 각처에서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순교하게 되었다. 이때 윤유일도 체포되어 양근 관아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그는 갖가지 문초와 형벌을 당하면서도 전혀 신앙을 버리지 않아 1801년 4월 27일(음력 3월 15일), 양근 관아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큰길가로 끌려나가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곳과 강 건너 양근은 윤유일과 윤유오 형제 뿐 아니라 4촌 여동생 윤점혜(아가다), 윤운혜(마르타)와 윤운혜 남편 정광수(바르나바), 유한숙, 권상문(세바스티아노), 김일호, 이 아가다, 그리고 조숙, 권 데레사 동정 부부 등이 태어나거나 살다가 체포되어 순교한 곳으로 천주교 에서는 ‘양근성지’로 기리고 있다.
□ ‘주어사’ 터는 어떻게 찾았나?
주어사에 대한 창건과 폐사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지난 1962년 병인박해 순교자인 남종삼의 손자인 남상철(南相喆)이 당시 여주군 금사면 하품리에서 《해운당 대사 의징의 비(海雲堂大師義澄之碑)》를 발견했다. 남상철은 1962년 1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천주교 계간지인 ≪경향잡지≫에 ‘한국 천주교의 요람지인 주어사 발견됨’이라는 글을 세 차례에 걸쳐 기고하며 주어사 터의 발견 사실을 널리 알렸다.
그는 당시 여주군 금사면 하품리 423번지에서 누대 살아온 당시 86세 된 박영서 노인을 통해 주어사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마침내 주어사터를 구체적으로 확인하였다며, 주어사는 여주군 금사면 하품리 산 106번지 일원에 자리하고 양자산 중턱에 있으며, 1962년 당시 도랑에 묻혀 있던 ‘漢宣帝 五鳳 元年 三封築 한선제 오봉 원년 삼축봉’이라고 새겨진 비석과 절터 오른쪽 아래에 있었던 비석 2기 중 ‘해운대사의징지비 海運堂大師義澄之碑’에 ‘숭정기원후무인5월일입 상좌수견천심 崇禎紀元後戊寅五月日入 上佐守堅天心’이라는 비문이 발견되었다고 밝혔다.
‘숭정기원후무인’은 중국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崇禎) 연호 시작(1628년) 이후 무인년(戊寅年 1698)을 의미하며, 조선시대에는 청나라를 오랑캐로 규정한 사대부와 민간에서 청나라가 아닌 명나라 연호를 계속 사용했다.
이런 것으로 볼 때 주어사는 최소한 1698년 이전에 창건되어, 권철신이 정약전 등과 함께 머물면서 강학을 했다는 1779년(정조 3)에는 불교 사찰로 유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 학계의 의견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 중 하나는 주어사지 추암당대사 정여 승탑(走魚寺地 就岩堂大師 靜如 僧塔)이다. 이것은 주어사지에서 1997년 발견된 유물로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며, 1997년 여주군 문화공보실에서 수습하여 향토사료관에 전시되다가 현재 여주박물관 야외공간으로 옮겨졌다.
발굴되거나 발견된 유물의 수는 다른 유적에 비해 적다고 할 수 있으나, 여러 차례 발굴조사에서 글을 새긴 기와와 우수한 품질의 백자 등이 발견됨으로서 규모에 비해 여주 주어사는 사찰의 역량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주어사지의 보전 필요성에 대해 “여주 주어사지는 접근이 어려운 입지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명문 기와편과 양질의 백자편 등이 출토되었고, 반출된 해운당대사탑비와 취암당대사 승탑 등을 통해 조선시대 중기에 사세가 작지 않은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779년(정조 3) 녹암 권철신(鹿菴 權哲身)이 정약전(丁若銓) 등의 제자들과 함께 머물면서 강학을 했던 장소로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주 주어사지는 현재 집중호우 등 자연요인으로 인하여 훼손이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유구 보존을 위한 보존·정비와 인접 계곡에 대한 관리 대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여주 주어사지, (재)불교문화유산연구소 학술총서 제76책, 2025
□ 주어사, 종교 화합의 상징
올해 초 여주시는 주어사지 입구에 안내판을 새로 설치했다.
「주어사지는 산북면 앵자봉 기슭에 위치하며, 주어사란 사명은 한 승려가 절터를 찾던 중 잉어를 따라가다가 잉어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지으라는 꿈을 꾸고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주어사는 1779년(정조3) 녹암 권철신(1736~1801)이 정약전(1758~1816) 등의 제자들과 함께 머물며 천주학 등 새로운 학문에 대한 강학을 하였던 곳으로, 한국 천주교와 불교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장소이다.
여주시는 2009년 주어사지에 대한 지표 및 학술 조사 연구를 실시하여 5기의 건물지를 확인하였다.
건물지들은 해발 350~400m, 사이의 곡간 사면부에 입지하며, 지형이 대부분 경사가 급하거나, 매우 협소하여 석축단을 쌓아 마련한 공간에 건물을 조영한 것으로 보인다. 조사에서 수습된 기와와 도자기 등의 유물들로 판단하였을 때 그 중심 시기는 조선 후기17~18세기로 추정된다.
2022년 발굴조사에서는 본존불을 모신 법당과 요사채 등의 건물 2동과 ‘조와화주신 造瓦化主信’ 글씨가 있는 기와, 고대 인도문자인 범자가 찍힌 암막새, 백자 조각, 상평통보 등이 발견돼 사찰의 면모를 갖추었음을 확인하였다.」
즉, 주어사지는 단순히 특정한 종교의 성지가 아니라, 다양한 사상이 교류하고 종교 간 관용과 상생이 실천된 범종교적 성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주어사지는 현대 사회의 종교 갈등과 배타성을 넘어, 화합과 포용이라는 시대정신을 담아낼 수 있는 상징적인 장소로 의미가 있다.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기리기 위해 앞으로 관련 학술대회 등을 통해 우리 선조들의 관용과 상생의 정신을 문화 콘텐츠로 발전시켜 생명존중과 세계평화라는 인류의 공동 가치를 실현하는 장소로 거듭나길 기대하며 연재를 마친다.
이글은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main/main.do》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ttps://kyu.snu.ac.kr 》
《국립중앙도서관 https://www.nl.go.kr》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
《불교신문 https://www.ibulgyo.com》
《가톨릭신문 https://www.catholictimes.org》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https://cbck.or.kr/koreanmartyrs 》
《여주 주어사지, (재)불교문화유산연구소 학술총서 제76책, 2025 》
《여주시사 https://www.yeoju.go.kr/history/index.do 》 등의 자료를 참고하여 썼음을 밝혀 드립니다.
※이 기사는 재단법인 여주세종문화관광재단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