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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시대와 아날로그 사내

디지털시대와 아날로그 사내

  • 기자명 이종화(시인)
  • 입력 2009.04.06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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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웅(白熊). 흰곰. 이것이 그 곰같은 사내의 아호이다. 1미터 6십5 정도의 보통 키에 평생을 흙과의 단순노동으로 다져진 강단이 한눈에도 보이는 몸집,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팔뚝근육이 어찌나 단단한지 찔러도 요지부동으로 잘 들어가질 않는다. 하지만, 세월은 곰같은 사내마저 모른 체를 하지 않아 안구 각막이식 수술을 하는 등 거친 흔적을 그에게 남겼다. 콩팥수술까지 받아 사내는 스스로를 “쓸개 없는 곰”이라고 말하며 씁쓰레 미소를 짓는다. 이 곰같은 사내는 한평생을 흙과 씨름하며 살았다. 가장으로 식솔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농사를 짓는 한편, 남는 시간을 쪼개어 찰흙으로 도자기를 빚고 굽는 일에 몰두를 했다. 요즘처럼 약아빠진 디지털 시대에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도, 상품으로 팔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조부가 그랬고 부친이 그랬고, 사내 역시 어깨 너머로 익힌 도자기 기술로 고집스레 한평생 그릇만을 만들었다. 세상에 태어나 흙과의 만남에서부터 사내의 숙명이 움텄기 때문이리라. 사내에게서는 숙명의 그림자가 엿보였다. 가스가마, 전기가마 등 디지털시대에 맞는 첨단 기술이 있음에도 사내는 현재에도 장작가마를 고집한다. 그래서인지, 사내가 장작가마에서 구워내는 그릇들은 말끔하게 잘 다듬어진 작품들이 아니라, 불티가 곳곳에 박힌 고색찬연한 아날로그시대의 빛깔이다. 은근하고 깊은 우리 백의민족에게 잘 맞는 신비의 색이다. 이 사내가 바로 여주의 백웅 한상구(白熊 韓相龜)옹이다. 현재 경기도 무형문화재 사기장 41호이다. “소문을 듣고 찾아오셨을 텐데, 너무 볼거리가 없어 실망하셨죠?” 내가 찾아갔을 때, 도자기 전수자로 부친의 대를 이어 도자기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곰의 아들이 던진 첫마디이다. 해양대학을 졸업한 아들은 외항선을 타고 망망대해에서 살아오다시피 하다가 항구에 닻을 내린 선박처럼 아예 이곳에 정착했다 한다. 그 흔한 도예연구원 간판이나 문패도 없고, 심지어 울타리도 없이 흔들흔들 쓰러져가는 3칸 허름한 집이다. 봄이 코앞에 와있는 계절이어선지 집 주위가 너무 을씨년스럽게 황량하고 삭막해보였다. 그래서 왕벚꽃나무라도 사올 테니 심어보시겠습니까, 하고 내가 말했으나 무안하게 한마디로 거절을 한다. 미리 물어보지도 않고 나는 이곳에 벚꽃나무를 사오려고 했는데, 하마터면 부질없는 짓을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여겨져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있는 나무 몇 그루도 잘라버리려고 한단다. 낙엽이 떨어지면 나중에 흙에 섞여서 골라내는 것도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사내가 만든 도자기 작품들이 방 구석구석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선반 위엔 깨어진 도편들이 수없이 쌓여 있다. 작품 구경을 좀 시켜달랬더니 창고로 가서 자물쇠로 굳게 잠긴 문을 연다. 작품들은 제대로 된 전시관 하나 없이 창고 선반에 아무렇게나 마구 쌓여있다. 조선 청화백자의 신비스런 빛깔을 찾아 사내는 박물관에 수도 없이 드나들었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수집한 소재를 실험하고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드디어 조선백자의 비색을 재현하는데 성공한다. “할아버지부터 도자기를 구웠어요. 아버지랑 형님이 빛깔 때문에 애를 먹는 것을 보고 오기가 나더라고요. 도대체 저게 뭔데 하고요.” 당시에 30살인 사내는 도자기를 잘 몰랐다. 그래서 관요가마터의 도요지였던 광주 분원에 가서 백자 파편을 모아와 연구하고, 남에게 배울 생각도 하지 않았다. 부친 어깨 너머로 익힌 기술이 전부이다. “남에게 배우면 흉내만 내게 돼요.” 가마에 불을 지폈으나 도자기를 꺼내 보면 마음에 차지가 않아 깨뜨리기가 부지기수였다. 6개월이 걸려서 온갖 정성을 다해 한번씩 굽는 도자기였는데… 그때마다 바보처럼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고, 망연자실하게 보낸 세월이 반생이 흘렀다. 생활고로 집이 파산을 해 아이들과 생이별을 할 뻔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날, 무심코 집 앞 텃밭을 보다가 그는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햇볕과 비와 흙이 맞아떨어지면 싹이 절로 틉니다. 움트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뿌리가 나서 지상으로 밀어올리는 겁니다. 뚜껑처럼 덮였던 흙을 밀고 올라오는 새싹, 도자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천신만고 끝에 우주의 섭리를 깨달았던 것이다. 비로소 그는 조선 청화백자의 비색을 찾는데 성공하고, 삶의 달관의 경지에 가까이 이른 듯이 보인다.소문을 듣고 신문기자들이 찾아와 취재를 하고 사진을 찍으려 해도 사내는 한마디로 사양을 한다. 선천적으로 농사 밖에 모르던 그는 유명해지는 것도 어색하고 부끄럽기 때문이다. 내가 찾아간 날은 그래도 많이 봐주는 편이었다. 내가 처음 찾아갔을 때 그는 자신이 만든 그릇에 차도 내어놓고, 끝내 점심까지 먹고 가라면서 사양하는 나를 붙들어 앉혀놓고 오래도록 대화를 나눴다. 늙은 그의 아내가 개다리 밥상에 차려낸 잡곡밥, 조미료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김치와 무우말랭이, 계란말이가 일류 한정식의 음식보다 더 꿀맛이었다. 두번째 내가 찾아갔을 때, 곰사내는 곰답지 않게 출산이 임박한 여인처럼 불룩한 배를 어루만지며 속이 거북해 아침밥을 먹지 못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마트에 가서 고량주 두 병과 미나리 한 묶음을 사들고 세번째로 다시 그를 찾았다. 사는 김에 초코파이도 한 상자 샀다. 미나리를 넣고 끓인 물에 고량주를 소주잔으로 꼭 한잔 넣은 뒤 30분쯤 푹 삶아내어 물을 마시면 허약한 간과 심장, 신장 등 내열을 가라앉히는데 특별한 효험이 있다. 나도 그렇게 해서 효험을 보았기에 그에게도 그 민간요법을 알려주었다. 내게 민간요법을 알려준 한의사를 지금도 나는 잊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이 찾아올 때 손에 무엇을 들고 오는 손님이 제일 부담스럽다는 백웅 사기장이었지만, 나의 민간요법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워하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플 때 나는 지금도 가끔 “쓸개없는 곰”을 만나러 그의 초라한 집을 찾는다. 그 어떤 향수에 이끌려 그곳에 다녀오면 씻은 듯 머리가 말끔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한 고즈넉한 여인을 사랑했다. 이조의 여인 같은, 아날로그 사내가 바로 그런 여인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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