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자만과 절개

자만과 절개

  • 기자명 추성칠(본사 객원논설위원)
  • 입력 2009.03.23 09:13
  • 0
  • 본문 글씨 키우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점동면 사곡리 371번지에 이계전(李季甸)의 묘가 있다. 이계전은 호가 존양재(存養齋)이며 고려말 삼은인 이색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이조참의 이종선이며, 권근의 외손이다. 1427년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가 되었다. 1453년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정난공신이 되었고 사육신을 제거한 공로로 좌익공신이 되었다. 사육신 이개(李塏)의 숙부였다. 이개의 아버지인 이계주(李季疇)는 첫째아들이었으며, 이계전은 셋째였다. 형제의 운명이 바뀐 것은 외사촌 동생인 권람(權擥) 때문이었다. 권람의 아버지 권제(權 )가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사사롭게 곡필(曲筆)한 것이 발각되어 고신(告身)과 시호를 추탈 당하자 수양대군 쪽으로 서게 되었고 이계전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이계전이 집현전 수찬이었을 때 아들인 이우( ), 이파(坡)와 김시습을 함께 가르쳤다. 김시습은 논어의 학이편의 *‘학이시습지불역열호’에서 따 시습(時習)이란 이름과 호(悅卿)를 지었다. 영의정이던 허조가 김시습을 시험하기도 했다. 오세(五歲)신동의 명성은 세종대왕에게 알려진다. 도승지인 박이창이 받아든 어제(御製)를 펴 보니** ‘아기의 공부는 흰 학이 하늘에서 춤을 추는 듯 하도다’였다. 김시습의 답변은 ***‘임금님의 덕은 눈부신 용이 바다에서 노니는 듯합니다’ 라고 썼다. 하사품인 비단 쉰 필을 손 빌리지 않고 재주껏 가져가라 하니 끝을 풀어 허리에 매고 나와 모두 감탄하였다. 김시습은 세종 32년 사마시에 이우, 이파, 노사신 등과 나란히 급제하여 열일곱 살에 생원이 되었다. 하지만 단종 1년 증광시에 나갔다가 낙방했다. 그가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스승의 평범했던 형제의 급제였다.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에 정진하던 김시습은 세조의 찬탈소식을 듣고 가지고 있던 온갖 책들을 모두 불살랐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묘향산, 금강산, 오대산, 계룡산, 내장산, 무등산, 지리산으로 떠돌았다. 이계전의 막내아들은 이봉(李封)이다. 그는 1465년(세조 11년)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중시에 급제했다. 형들보다는 늦되었지만 문장으로 우뚝했다. 술과 난봉질도 유명해서 이칙, 이육, 이감과 함께 장안의 사이(四李)로 통했다. ****이봉이 여주의 신륵사에서 과거공부를 하다가 돌아갈 때 여주목사가 송별연을 베풀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이봉은 원님에게 사이와 함께 놀다오겠다며 배 한 척과 기생 네 명을 빌려달라고 하였다. 송파나루가 보일 때까지 마셨다고 전한다. 둘째아들인 이파는 대사성, 예조판서를 지냈고 막내인 이봉은 호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거친 집안이었으니 아버지의 묘소가 작았을 리가 없다. 석물도 크고 웅장했을 것이며 묘를 가로지르는 물을 건너기 위해 다리도 놓았을 것이다. 훗날 이 자만심은 영릉 천장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지관이 여주지역을 돌다가 비를 만나 피하게 되었는데 이때 구름너머로 햇살이 비췄다. 햇빛은 젖은 비(碑)를 반짝이게 했고 지관은 이를 보고 한번에 명당임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영릉 천장으로 인해 조선왕조는 백년이 연장되었다고 한다. 이계전의 묘를 이장시킨 것에 대한 이유다. 그만큼 명당이란 것이다. 아버지 덕에 출세했고 자부심으로 인해 부친의 묘지는 강제 이장되었다. 자만심은 존재를 위태롭게 하는 원인이다. 김시습은 세종대왕으로부터 상을 받을 만큼 공부에 뛰어났다. 생애는 순탄치 않았다. 15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도 중병이었다. 당연히 과거준비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현실보다 어렵고 힘든 절개를 택했다. 깨끗한 이름은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다. *學而時習之不亦悅乎 **童子之學白鶴舞靑空之末 ***聖主之德黃龍 碧海之中 ****이문구의 소설 「매월당 김시습」
저작권자 © 여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