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내가 나 아닐 때

내가 나 아닐 때

  • 기자명 이상국(본사 객원논설위원)
  • 입력 2009.03.16 09:51
  • 0
  • 본문 글씨 키우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목사님과 예약된 만찬에 어떤 옷을 입고 나갈까. 정장을 할까 평상복을 할까. 궁리 끝에 노타이에 잠바를 입고 나섰지만 결례가 될까 걱정이다. 그런데 언제나 와이셔츠에 넥타이 차림인 목사님이 캐주얼이다. 맙소사. 그러나 오 ― 예! 은근히 결례를 범한 것 같아 조바심하던 양심이 안도(安堵)한다. 교회에 갈 때면 갈등한다. 천지창조를 하시고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과의 대화의 장(場)인데 하얀 와이셔츠, 단정한 넥타이, 싱글 정장으로 깔끔해야 하거늘 노타이 차림에 평상복으로 나서는 나는 죄인이다. 죄인인줄 알면서도 넥타이를 안 매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늙어 목이 주저앉고 아래턱 살이 올라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면 면도날처럼 날카롭고 빳빳해야할 셔츠의 칼라가 반쯤 접혀 끝자락이 턱으로 치솟아 올라 여간 촌스러운 것이 아니다. 여북하면 1년에 한두 번 서울 으리으리 호텔 문학 모임에 나가 주빗주빗 서성거리면 섹시한 여류 수필가가 턱으로 치받는 칼라 섬섬옥수로 바로 잡아주기를 서슴지 않으랴. 줄어든 목을 잡아 뽑든지, 살찐 턱을 오려 내든지, 아니면 칼라를 셔츠에 접착제로 붙이든지 바늘로 꿰매든지. 아내에게 하소연해도 별 신통한 방법은 없는 모양이다. 넥타이에 관한 내 고집도 만만찮은 편이다. 결혼식이나 장례식, 제사, 시제(時祭) 자리에 노타이 차림으로 참석하는 놈은 아예 인간취급도 하지 않던 나다. 차례(茶禮)나 제사, 시제는 아버지, 할아버지, 조상님들과의 대면(對面)이고, 결혼식은 인간의 섹스와 동물의 교미의 차이를 분명히 하자는 인간 존엄의 의식이다. 이렇게 토를 달며 넥타이 매기를 장려 내지는 강요해 왔다. 그런데 그게 요즘 제대로 먹혀들지 않는다. 교회만 해도 100여명이 웃도는 신자들 중에 넥타이를 맨 사람은 목사, 부목사, 장로, 집사 5, 6명을 빼곤 모두 노타이다. 결혼식, 장례식, 차례나 제사 시제에 넥타이를 매는 사람도 드물다. 너도나도 넥타이를 풀고 보니 자세까지 뭉개졌다. 장례에서 초혼(招魂)은 물론 곡(哭) 소리마저 사라지고, 두 손 가지런히 모아 공손히 큰절하는 게 아니라 팔 벌려 넙죽 절하는 망나니 스타일, 한번 절할 걸 두 번 절하고, 두 번 절할 걸 한 번 절하는 무지몽매한(漢), 축문은 물론 지방까지 생략하는 축약형으로 절도와 격식은 사라졌으며, 아버지와 할아버지, 조부와 증조부의 대(代)까지 뒤섞기를 서슴지 않으니 해괴한 의식의 연속이다. 그렇다고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전통만 고집하고 싶지 않다. 아―! 이럴 때 박정희 대통령같이, 간소하고 산뜻한 신세대 가정의례준칙을 만들어 반포(頒布)해줄 의인(義人) 한 분 없을까. 역사 - 미술, 문학, 철학, 과학, 문화… 전반에 걸쳐 근대 이후 몇 년 사이 다양화 급속화가 폭발하다보니 옷차림 또한 초고속으로 다양화하는 모양이다. 옷차림이 빈부의 격차나 고귀함과 비천함, 엘레강스나 키치, 엄숙과 천박의 선을 긋던 시대는 끝났다. 그런데 이 몸 둘 바 모르는 혼돈의 옷차림 시대에 넥타이를 고집하자니 헐렁해진 목이 목줄 풀린 개 모양 반란을 일으키고 캐주얼을 따르자니 하나님과 조상님, 인간 존엄에 대한 불충은 물론, 질서와 규율, 의리에 대한 배신이 보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요즘. 나는 내가 아니다.
저작권자 © 여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