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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온다

그날은 온다

  • 기자명 이상국(본사 객원논설위원)
  • 입력 2009.02.09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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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년아. 넌 눈이 없냐. 날 어떡할 껴, 이년아.” “네, 할머니. 잘못했어요, 제가 병원에 모시고 가서 다 고쳐드릴게 요.” “이년아, 저것은 어떻게 헐껴.” “네 제가 다 변상해드릴게요. 전처럼 똑같이 해드릴게요. 죄송해 요.” “이년아, 넌 눈이 없냐. 이 미친년아, 내가 죽었으면 어쩔 뻔했어. 이년아. 난중에 내가 아프면 어쩔 껴. 이년아. 어떡 헐껴~.” 교통사고 현장 ― 젊은 여자 운전자가 폐휴지를 모아 연명하는 노인을 치어 수난을 당하는데, 이 몇 마디 욕설로 손에 손잡고 모여든 가난한 노파에 대한 동정심들이 어느 틈에 손을 풀고 뿔뿔이 사라졌다. 숭례문 방화범이 70 노인이요, 벌교 앞바다 성폭행 살해범이 70 을 넘긴 노인이라는 매스컴 보도는 한참 지난 애기다. ‘61세 이상 범죄자 10년 새 두 배 증가, 성폭행 4배, 살인 3배, 방화 5배 늘어’ 이게 엊그제 신문기사다. 코끼리는 때가 되면 공동묘지에 가서 죽는다는데 만물의 영장이며 존경의 대상이어야 마땅할 인간은 늙어서까지 자기과시를 못해 이 안달이다. 이런 광고를 본적이 있다. ‘어린이 두엇 외진 자리 동그마니 앉아있고, 나머지 전좌석이 노인일색, 경로석으로 둔갑한 장래의 지하철.’ 애 안 낳는 풍조에 밀려 이 모양 이 꼴이 될 테니 애 좀 낳자. 애 좀 낳아. 단군 이래 오로지 단일 민족임을 세계만방에 고해온 이 대한민국이 하루아침에 외국인 이민을 끌어들여 혼혈을 권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요, 나라 지킬 군인이 모자라 가난한 나라 청소년을 사다 삼팔선에 세워 용병을 하기도 막막한 일이다. 반면 의술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이 연장되자 노령인구는 하염없이 늘어나고, 늘어난 늙은이 지하철 운임이 공짜이다 보니, 안 돌아다니는 곳이 없다. 서울에서 출발해 안양에서, 내용도 모르는 강연회에 앉았다가, 거기서 거저 주는 점심 얻어먹고 돌아오는 것은 진부한 구식이다. 천안에서 출발. 종로 3가에 도착. 영어강의 듣고 인사동 어딘가 물 좋은 곳에서 애창곡 기차게 불러 스트레스 확 풀고 내려가면 기막힌 하루가 끝 ― ! 요즘 5060텐포족(ten―four族)이란 게 있다. 대형서점에 아침 10시에 출근해 오후 4시까지 공짜 책 읽고, 공짜로 탐닉하며, 공짜로 연구하고, 공짜로 자신을 되돌아보며 글 읽다 퇴근하는 5, 60대 노인들. 가끔 이런걸 보고 울화가 치민 적이 있다. 서울대, 연대, 고대…. 고급 두뇌들이 퇴직하고 나와 애 늙은이가 되어 이리저리 방황하며 세월 죽이는 것을. 배운 게, 두뇌가 아깝지 않느냐는 내 물음에 일류 대학이란 것 졸업한 지 3, 4년이면 이류, 삼류 모두 똑같아 지는 것 아니냐 반문하는 말에. 와아 미치겠는 거―. 뭐라고. 대학, 대학원 졸업하고 팽팽 노는 젊은 애들도 득시글하다고. 야.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지식이, 고급 두뇌가, 하수구로 철철 흘러넘치니 뭔 일이야. 비료학(肥料學)에 ‘최소의 법칙’이란 게 있다. 작물을 재배함에 있어 N, P, K, Mg, Ca…, 모든 영양소의 함량이 아무리 많아도 가장 적은 영양소의 결핍 하나로, 그 많은 잉여 영양소는 최소 영양소의 량만큼만 유효하고 나머지는 몽땅 못쓰게 된다고. 누가 이 최소 결핍 영양소를 찾아 해결할 사람 없을까. 아. 대통령인가. 대통령. 그건 그렇다 치고. 천안에서 출발해 종로에서 영어 강의를 듣고 노래 한 곡 뽑는 노인이 종로에서 천안 왕복 지하철에서 통독하는 책이 그냥 시시한 회화 책이 아니다. 열 줄, 스무 줄 구문으로 연결된 장문의 영어를 구사하는 전문지식인의 것이다. 출세, 성공이란 게 꼭 젊어서 이루어야만 할 일이 아니다. 평생 남의 소작인이요 머슴으로 살다 나이 60이 넘어 절치부심, 마지막 시작한 음식점이 번창해 돈방석에 앉기도 하고 늙어 결사적이며 본격적으로 쓴 소설이 노벨 문학상을 타기도 한다. 노인, 우려와 걱정, 처치곤란,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인생의 끝자락, 역동하는 조국 근대사의 주인공이며, 20여년 형설지공(螢雪之功)의 축적된 학습이 있고 평생 직업인 ― 엿장수건, 농사꾼이건, 장사꾼이건, 말단 공무원이건, 딴따라건 전문가로서 남들 까맣게 모르는 노하우가 있다. 농익어 떨어질 것만 같은 노인들의 잠재력을 믿는다. 잠재성. 그들에게 어중간한 “… 같아요.”란 말투는 싹둑 잘라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단호함이 있다. 초등학교에서 싸릿가지로 중·고등학교에서 야구 방망이로 군대에서 야전침대 각목으로 맞으며 컸다. 한탄강 쏟아져 내리던 첩첩히 쌓인 6.25의 시체를 보았고 미군들에 능욕 당하던 누이를 기억하며 아스팔트에 흐르는 4·19 붉은 피, 5·16, 광주사건의 체험이 있고 일본어에서 한문, 영어, 한글로 이어지는 언어의 강을 몇 번씩 갈아탄 인생. 인생역정이 있고 부러져도 구부러지지 않는 자존이 있으며 꺼지지 않은 불씨가 있다. 언젠가 뻥하고 터질 날. 밤하늘 불꽃처럼 뻥 뻥 뻥, 폭죽 터질 날. 그날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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