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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이상국(본사 객원논설위원)
  • 입력 2008.12.19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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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걷이가 끝난 지 한 달, 한 해가 기운다. 땅이 얼고, 눈 내리고 북풍이 분다. 동토의 겨울이다. 겨울 창고 깊숙이 갈무리한 씨앗이 잠들었다. 기나긴 꿈의 나래를 펴는 깊은 잠. 나는 이런 꿈을 꾼다. 지난 가을 고구마 덩굴이 무성해 덩이 뿌리인 고구마가 제대로 여물지 못할 것 같았다. 잎의 성장을 억제하고 뿌리로 양분을 유도할 심사로, 아침 이슬 치기에 칼리를 하얗게 뿌려 놓았다. 뜨거운 햇볕으로 싱싱하던 잎이 까맣게 타 죽었다. 고구마 일생 끝났구나. 그게 아니다. 하루 이틀 닷새. 칼리와 이슬이 모여 합성한 고장액으로 구멍 난 조직을 초록으로 메워 놓고, 그늘 밑에 숨죽여 암중모색하던 새로운 수천수만의 잎들이 일취월장 성장해 짠하게 원상회복 해 놓는 거다. 고구마 밭 싱싱했다. 여름, 누군가 논두렁콩에 제초제를 뿌리고 지나갔다. 보기 흉해 낫으로 몽땅 도려 버릴까하다 제초제 뿌린 놈, 양심의 가책이라도 보고 싶어 그대로 두기로 했다. 사흘 후 엉성한 그물망으로 남아 있던 잎에 엽록소가 하나 둘 박히는가 싶더니 일주일 후 깨끗이 치유되었다. 재생의 논두렁 콩. 보라색 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주까리. 이름만으로도 모질고, 씨앗의 생김새나 식물체 이미지만으로도 생명력 왕성한 개체다. 울안에 한 그루 자생으로 나서 자라는데 벌레가 생겼다. 열나게 갉아 먹다 지치면 찢어진 잎 돌돌 말고 낮잠을 잔다. 파먹고 갉아먹고 낮잠 자고 일어나 다시 먹고 온전한 잎이 없었다. 그렇게 먹히고 먹다 벌레가 나비 되어 날아간 뒤 아주까리 열매를 맺고 파랗게 다시 자라고 있었다. 작년 벼 이삭이 와아 함성을 지르며 솟아나올 때 도열병, 혹명나방, 멸구약을 뿌렸다. 예년으로 치면 그게 마지막 농약 살포다. 올해 농사 끝. 두 손을 놓았다. 웬걸, 혹명나방이 기승을 부린다. 오직 나의 논에만, 논마다 내 이름 석 자를 써 붙이고 내 논에만 모이는 모양이다. 톡톡 불거지도록 야무진 벼이삭을 위하여 싱싱해야 할 벼잎이 하얗게 탈색해 초록이 사라지고 갈색으로 말라 죽는 거다. 논이란 논 전체가 그 모양이니 일 년 농사가 끝장이 날판이다. 이미 약을 뿌려도 효험이 없을 것 같아 그냥 둘까하다 내 이 농사를 못 먹어도 혹명나방 몽땅 잡아 원한 갚으리. 약을 뿌렸다. 그리고 하얗게 변해버린 논바닥이 보기 싫어 며칠 두고 못 본체 했다. 오랜 후에 나갔다. 논이, 논이 파랗게 다시 살아 탄수화물을 만들고 아밀로스를 만들고 단백질을 제조하고…. 가을 하늘 아래 가장 바빴다. 농사가 사양(斜陽) 직업이라고 손 탁탁 털고 서울로 도시로 모두 떠난 허허로운 시골, 옛 향취 사라진 농토, 촛불로 불 밝히는 도시와 또 다른 국토, 스무 살 청춘 한 달 봉급 88만원으로 누추해진 경제, 끊임없이 잡고 잡아내도 불법과 불의로 얼룩진 뉴스를 읽는 주름진 일상의 동토에서 그래도 희망의 봄은 온다. 아직도 꿈은 유효하다. 신춘, 새 봄은 또다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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