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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얼굴

  • 기자명 이상국(본사 객원논설위원)
  • 입력 2008.09.26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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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을 하고 세상 여백(餘白)에서 산지 3년. 먹고 자고, 자고 먹고, 하는 일이란 책 읽기와 글쓰기뿐이니 내가 나를 사육 중이다. 살찌는 나. 얼굴인지 볼 따귀인지 인정사정없이 마구 삐어져 나오는 살, 살, 살. 찐 살 하루아침에 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늙어 다이어트를 한다는 것도 개가 웃을 노릇이라 방관하니 갈수록 태산이다. 공군에 입대할 땐 체중 45kg으로 제주도 돌이냐는 핀잔을 들었고, 허리를 조여 잡으면 양 손아귀 안에 쏙 들어갈 정도로 말라 갓 시집온 아내가 제발 살 좀 찌라고 주문까지 할 정도였는데 이게 웬일이냐. 이 똥배, 이 얼굴 어딜 들고 나가나. 개, 돼지, 송아지, 망아지, 닭들에게도 없는 오로지 인간에게만, 인간의 증표로서의 얼굴. 이 얼굴이 내 아이덴티티이며 모든 감각의 총체 ― 5감의 감각기관이 모인 얼굴. 나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내 얼굴, 얼굴이 이 모양이라니. 이목구비 또렷하고 세상천지 유일무이 고귀한 내 얼굴, 마구잡이 찌는 살로 희미해져가고 있다. 희미함. 음과 양의 뚜렷한 경계, 요철(凹凸)의 금 긋기의 분명함. 그게 없어지면 희미해지는 거다. 따라서 나는 지워지고 있다. 세상의 공백, 세월의 여백에서 희미하게 지워지고 있다. 이런 일이 있다. 1960년대 군대는 요즘 군대가 아니다. 배가 고팠다. 구식 M1 소총으로 집총하고 구보에 오리걸음, 총검술, 각개전투…. 배가 고팠다. 훈련도중 무를 뽑아 먹다 들켜 무를 입에 물고 기압을 받으면서도 무를 야금야금 씹어 먹었다. 먹고 또 기압을 받았다. 그렇게 배가 고팠다. 그런 날들 중 생일날. 취사장에 들어서서 두 손 공손하게 모아 쥐고 허리 굽혀 취사병에게 잘 부탁합니다. 생일 날 이거든요 하니, 뭘 부탁해 깎는 거. 당시 취사병들은 식판에 수북이 밥을 퍼 담았다가 거의 바닥만 남기고 싹 깎아버리곤 했다. 그렇게 했다. 망할 자식이 식판 수북한 내 생일 만찬을 아주 조금만 남기고 싹둑 깎아버리는 거다. 그때 하염없이 추락하는 나를 보았다. 추락하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별 볼 일 없는 나. 그냥 아무렇게나 시궁창에 쑤셔 박혀 죽을 수도 있고, 개밥의 도토리만도 못하며, 내가 달달 외우고 있는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 구르몽의 ‘낙엽 밟는 소리’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서정주의 시, 피천득의 ‘인연’, 키에게 골의 ‘아레까 고레까’, 릴케의 ‘가슴 답답한 고백’, 그런 거 한 끼 배고픔 앞엔 무용지물이었다. 그 후 실존이 뭔지 모르고, 아내를 기똥차게 예쁜 여자로 고를 필요가 없었으며, 먹을 거 입을 거 잠자리 고급으로 탐하지 않았다. 머리를 짧게 깎았다. 군대뿐 아니라 제대하고 나와 나이 60이 넘도록 하이칼라 한 번 한 적이 없다. 구레나룻도 안경걸이 높이에서 싹둑 잘라냈다. 스킨, 로션, 크림, 에센스 한 번 발라본 일이 없다. 철저히 얼굴을 무시하고 지우며 사는 거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 중 ‘벨라스케스가 그린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 초상의 습작’을 보면 무중력 상태에서 초고속으로 낙하하는 교황의 비명 ― 존엄하고 숭고해야할 인간의 목소리가 아닌 원초적 한 마리 짐승으로서의 비명이 들리고, ‘인간의 머리에 관한 세 개의 습작’ 중 하나는 기껏 자화상 잘 그려 놓고 손바닥으로 뭉개 지워진 얼굴 속에 세차게 따귀를 얻어맞고 고개 돌린 인물. 자기 실종에 당황스런 비명이 들린다. 베이컨도 나처럼 밥그릇 빼앗긴 모진 경험이 있었던가. 그가 그리고 싶었던 것도 인간의 얼굴이 아니라 인간이전 동물로서의 얼굴을 그리고 싶었던 걸까. 얼굴을 버리고 나니 자유다. 운신의 폭이 넓어졌다. 더욱 편한 건 내가 내 앞에 부끄러울 필요가 없는 다행이다. 그 다행이었던 사라진 아이콘이며 아이덴티티, 실존이며 존엄으로서의 얼굴이 살이 찌면서 얼굴의 굴곡 ― 요철의 경계를 지우고 나를 지우며 관심의 수면 위에 떠올라 나를 속 썩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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