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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運)이란 무엇인가?

운(運)이란 무엇인가?

  • 기자명 추성칠(본사 객원논설위원)
  • 입력 2008.08.27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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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14년 3월 11일 문과 시험이 끝났다. 시관인 하륜, 정탁, 설미수는 급제자 중에서 뛰어난 세 답안지를 임금에게 올렸다. 태종이 “이 중에서 잘되고 못된 것을 가릴 수는 없는가”라고 묻자 “두 개는 비슷하고 하나는 좀 처집니다”라고 답했다. “내가 집는 것이 장원이다”하며 선택된 것이 정인지의 답안이었다. 김종서는 정인지보다 9년이나 빠르게 급제했지만 10여년간 하위직에 있었다. 1418년 종6품인 죽산현감을 거쳐 정6품인 병조좌랑에 오른다. 발탁된 사유는 단정한 글쓰기와 장중한 태도였다. 정인지는 장원급제의 힘으로 한번에 종6품에 제수된다. 태종은 세종에게 크게 될 인물이니 중용하라고 한다. 두 사람은 매우 달랐다. 김종서는 현장 수행능력이 뛰어났다. 세종이 즉위한 해에 김종서는 사헌부로 자리를 옮겼다. 강원도 관찰사가 흉년이니 세금을 감면해달라는 요청이었고, 임시파견 관리의 보고서에 풍년이라 보고한 때문이었다. 세종은 김종서에게 이를 확인케 하고 그의 보고대로 감면 조치했다. 반면 병조좌랑이던 정인지는 명나라로부터 세종즉위를 승인하는 의식을 행할 때 황색의장을 빼놓았다가 예조좌랑, 병조정랑 등과 함께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책임자이던 정인지는 장(杖) 40대를 맞고 벼슬에 복귀한다. 또 상왕 태종의 비상 출동훈련을 태만히 했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김종서는 강직함으로 인정을 받았고 정인지는 행정이나 일처리에는 허점이 많았다. 세종은 문제가 발생해 현장을 확인할 일이 생기면 늘 김종서에게 일을 시켰다. 정인지는 행정은 미숙했으나 학술에는 뛰어났기 때문에 집현전에 있었고 세종은 특히 자신이 키운 신하들을 신임했다. 황희는 유독 김종서를 미워했는데 이를 본 맹사성이 “종서는 당대의 명판서이거늘 어찌 그리 허물을 잡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황희는 “종서는 성격이 굳세고 기운이 넘치며 과감하기 때문에 뒷날 정승이 되면 신중함을 잃을까 염려해서 그렇게 한 것이지 미워하기 하기 때문은 아니다”라고 했다.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했을 때 김종서는 우의정으로 단짝인 황보인은 영의정에 오른다. 병약한 문종은 열두 살의 어린 단종을 잘 모시라는 특명을 내린다. 단종이 즉위하던 해에 정인지는 병조판서가 된다. 그러나 김종서의 배척을 받아 한직(閑職)인 중추부 판사로 밀려난다. 일년 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통해 실권을 장악하고 정인지는 좌의정이 되었다. 문종실록에 따르면 정인지는 치부에 열중하여 많은 재산을 축적했으며 전원(田園)을 널리 확보하는 바람에 인근의 인가까지 침범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사육신 사건이 끝나고 김종서의 아들인 김승규의 아내와 딸 등은 정인지에 하사되었다. 김종서는 사람이 강직하고 신뢰를 버리지 않아 죽었고 역적이 되었다. 운이 좋았던 정인지는 행정에 밝지 못했음에도 가장 높은 벼슬에 이르렀고 권세를 오래도록 누렸다. 후세들이 정인지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것은 지식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았고 선왕인 세종의 사랑을 저버린 때문이다. 현명한 군주였던 세종의 잘못된 판단 중의 하나는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을 관직에 앉힌 일이다. 한 살 터울인 형제는 정치인과 예술인으로 자라지만 문종의 죽음과 어린 조카의 등극으로 격랑에 휘말린다. 총명했던 수양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은 권력의 중심축이었던 도승지를 맡긴 일이다. 조선시대에서 행정능력은 관리의 전부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인지는 행정능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떨어졌지만 학술능력을 중요시하던 세종은 그를 중용했다. 또 정적(政敵)이 권력을 잡고 있을 때 운 좋게도 중심에서 밀려나 자연스럽게 반대급부를 얻을 수 있었다. 사람의 생애를 운이란 단어로 나타내기는 어렵다. 하지만 선택으로 점철된 생애를 종합하면 운은 당연히 존재한다. 살아가면서 잘된 것만 선택할 수는 없다. 태종이 선택하지 않은 두 장의 시권은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매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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