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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골목길 4>...청계천·미아리 ②

<대중가요의 골목길 4>...청계천·미아리 ②

  • 기자명 조용연 여행작가
  • 입력 2020.10.20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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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진 현대사의 고개, 배호의 창신동에서 미아리까지

창신동 그 가난한 판자촌은 배호가 부모를 따라 중국에서 귀국해 보낸 유년의 공간이다. 채석장의 절벽은 높고 연못은 깊었다. 잠시 산 부산에서 중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상경해 외삼촌 악단의 견습으로 시작한 배호의 음악 인생, 그의 노래가 본격적으로 피어나는 청계천 언저리를 천천히 지나간다. 나는 대중가요에서 가장 완벽한 음을 구사한다는 가수 배호의 천재성을 지금도 안타까워하는 수많은 가요 팬의 한 사람이다. 미아리고개를 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배호를 따라가 본다. 거기에는 우리 가요사의 또 하나의 별 반야월 선생이 <단장의 미아리고개>로 포연 자욱했던 통한의 ‘6.25시대’를 증언하고 있다. 미아리는 영원히 우리 가슴에 아로  새겨진, 쓰라린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길목이다.

금융의 중심 을지로의 옛 이름, 황금정

서울 중심의 가로축 도로 가운데 가장 변화가 적은 곳은 을지로다. 간혹 걷다 보면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향수가 절로 일어나는 거리이기도 하다. 일제 치하 을지로의 이름은 황금정(黃金町)이다. 오늘날의 명동인 본정(本町)과 함께 남산자락의 일인들이 활개 치던 영역이기도 했다. 이 이름도 을지로 입구에서 명동 근처에 이르는 구리개 고갯길에서 따왔다. 구리개는 ‘구릿빛 나는 진흙’이라는 뜻이다. 이를 한자로 동현(銅峴)이라 했고, 그 이름이 황금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름 따라간다’고 을지로에는 금융기관의 본사들이 몰려 있고 상업의 중심지다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 ‘황금에도 눈이 있다’는 말은 강렬한 멧시지를 던진다. 배호의 <황금의 눈>도 마니아 사이에서는 널리 애창되는 노래다.

1. 사랑을 아시나요 모르시나요/ 내 마을을 앗아버린 황금의 눈/ 막막한 이 한밤을 술에 타서 마시며/ 흘러간 세월 속에 헐벗고 간다/ 아~ 황혼길에 불타오는 마지막 정열 
2. 사랑을 아시나요 모르시나요/ 내 마음을 찢어버린 황금의 눈/ 꽃 같은 그 입술은 어느 손이 꺾었나/ 밤마다 그리움에 여위어간다/ 아~ 임자 없는 가슴 속에 새겨진 이름 
(‘황금의 눈’, 정성수 작사, 김인배 작곡, 배호 노래, 1966. 지구레코드)

욕망의 도시 서울로 모여든 군상들의 이야기는 같은 제목의 영화 <황금의 눈>의 주제가로 만들어졌다. 그 당시 최고의 유흥장으로 사랑받았던 카바레에서 연주하는 노래로 적격이다. 

1966년 김강윤 감독 작품으로 남양영화사(국제극장 개봉)가 제작하고, 박암, 김지미, 독고성, 장민호, 김희갑 등이 출연했다. 일등항해사 서훈(박암)이 약혼녀의 피살로 용의자로 몰리자, 여자 탐정(김지미)과 함께 기어이 진범을 찾아내 황금에 눈이 먼 세태를 응징한다는 해피앤딩의 영화다.

다시 만나고 싶어, 혜화동 그 거리에서

을지로를 가로질러, 청계천을 건넌다. 옛 동대문경찰서(현 서울혜화경찰서)와 전매국이 있던 뒷골목을 지나면 원남동 사거리다. 지금은 창경궁으로 이름을 되찾았지만 일제가 창경원으로 격하시킨 서울시민의 유일한 위락 공간이었다. 2천여 그루의 벚꽃이 피면 하루 25만 명이 몰려와 북새통을 이루고, 춘당지에서 보트를 타는 청춘남녀들이 부딪히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래도 서울의 깊은 밤은 적막해서 충신동까지 동물원의 맹수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었다고 토박이들은 전한다.

지금 서울사대부설여중이 있는 자리는 경성공업전습소와 중앙시험소가 있던 자리다. 대학로라는 이름도 경성제국대 법과대학이 의과대학과 길 하나 사이로 마주 보고 있던 시절에서 비롯되었다. 광복 후 이름을 바꾼 서울대학교가 늘어나는 몸피를 견디지 못해 ‘동숭동 시대’를 마감하고 1972년 관악산 자락으로 옮겨가기까지 마로니에 숲은 서울대 교복과 뱃지를 향한 선망으로 가득했다. 이제 문리대 본관 적벽돌 건물만 남아 서울대의 그 시절을 증언할 뿐이다. 또 하나의 살아있는 흔적은 ‘학림다방’이다. ‘since 1956'은 전쟁의 상처에 진물이 흐르던 때를 말한다. 외벽에 “우리에겐 아직 지키고 반추해야 할 어떤 것이 있노라고....” 적혀 있다. 스타벅스가 점령한, 깔끔한 커피가 대세인 틈새에 쓸쓸하게나마 건재하고 있는 학림다방이다.   이미 상업화의 바다가 되어버린 ‘대학로 문화’ 속에서 ‘학림’은 피난할 수 있는 외딴 섬이다. 삐걱이는 계단을 올라가면 최루탄 자욱한 우리들의 6~70년대를 불러내 접견할 수 있는 낡은 테이블이 있어 소중하다. 이쯤해서 귀에 익은 노래 한 곡을 들어본다. 비음이 섞인 매력 있는 허스키 보이스를 가진 가수 최유나의 <밀회> 2절에 혜화동이 등장한다. 

1. 한번만 예전처럼 다시 한 번만 광화문 그 찻집에서/ 지금의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당신을 만나고 싶어/ (후렴)어떻게 살았는지 말을 안 해도 눈물이 묻어나는 지나간 세월/ 가슴에 새겨둔 그 이름 하나 꼭 한 번만 다시 한 번만/ 당신을 만나고 싶어
2. 한번만 우연처럼 다시 한 번만 혜화동 그 거리에서/ 잠시만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 당신과 거닐고 싶어/  <밀회>, 김순곤 작사, 방기남 작곡, 최유나 노래, 1883, 현대음향

시적 감각이 남다른 작사가 김순곤이 귀한 만남의 장소로 혜화동을 정한 것은 1절의 ‘광화문 그 찻집’과 맞닿아 있다. 그 광화문은 오늘날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깃발로 충돌하고 있는 ‘이념의 광화문’이 아니다. 서정이 넘치는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길을 돌아 신문로 새문안 교회 언저리에서 멈추는 광화문이다. 최유나의 ‘혜화동 그 거리’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을 함께 거닐며 옛사랑의 주름진 얼굴을 비로소 쓰다듬어 보는 자리다. 맺지 못할 인연의 쉼표를 잠시 찍을 수 있는 여백이다.

혜화동 로터리는 옛날처럼 조촐하다. 신호등이 차 더러 잠시 쉬어가라고 하는 걸 빼면 달라진 게 없다. 이 로터리는 천주의 은혜가 가득한 공간이다. 혜화동 성당과 동성고등학교의 기운이 서려 있다. 필리핀 사람들이 일요장터를 여는 것도 성경 말씀 아래 모이는 주님의 은총이다. 고향 말 타갈로그어로 안부를 묻고 한 주일의 지친 일상을 털어내는 필리피노의 자연발생적 시장이다. 4.19 때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교문을 박차고 고등학생으로는 처음 시위에 참가한 용기를 자랑하는 동성고등학교 정문 앞이다. 

그 건너편에 있던 소피아 독서실은 70년대를 지나온 고시생들에게 추억의 자리다. 서울법대와 성균관대학이 가까이 있기도 했기에 고시 합격기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명당이었다. 최루탄 냄새 속에서도 고시 공부에 몰입해야 하는 청춘들이 스스로 영혼을 유폐하던 공간, 입신의 사다리에 올라타기 위해 살을 꼬집으며 잠을 쫓던 처절한 반 평짜리 박스였다.

가사 어디에도 ‘혜화동’이 등장하지 않지만 ‘동물원’이 노래 부르는 <혜화동>(김창기 작사·곡, 박보람 리메이이크)에는 어린 시절 추억을 찾아 혜화동으로 가는 청년들이 탄 덜컹거리는 지하철이 있다. 그들에게 돈암동 종점으로 가기 위해 힘겹게 삼선교 언덕을 오르던 전차의 기억은 두어 세대쯤 전의 낡은 흑백 필름일 뿐이다.

내 기억속의 목로주점, 혜화동 <석굴암>

또 하나 소환하는 기억의 모퉁이에 혜화동 <석굴암>이 있다. 복원된 혜화문 근처 방공호에 있던 목로주점 ‘알타미라’이다. 대학생들이 싼 맛에 가는 이 컴컴한 굴속에는 늘 촉광이 흐릿한 백열등 아래 대여섯 개의 테이블이 있었다. 깍두기와 전을 안주 삼아 막걸리잔을 부딪던 청춘의 주석이다. 한 번 휘두르면 3명이 쓰러진다는 전설의 주먹 허버트 강이 혜화동 언저리에 놀던 자리다. 석굴암을 생각할 때마다 이연실의 목로주점이 떠오르는 것은 ‘30촉 백열등이 그네를 탄다’는 빼어난 묘사 때문이다.

멋드러진 친구 내 오랜 친구야/ 언제라도 그 곳에서 껄껄껄 웃던/ 멋드러진 친구 내 오랜 친구야/ 언제라도 그 곳으로 찾아오라던/ 이왕이면 더 큰 잔에 술을 따르고/ 이왕이면 마주 앉아 마시자 그랬지/ 그래 그렇게 마주 앉아서/ 그래 그렇게 부딪쳐 보자/ 가장 멋진 목소리로 기원하려마/ 가장 멋진 웃음으로 화답해 줄게/ 오늘도 목로주점 흙바람 벽엔/ 삼십 촉 백열등이 그네를 탄다 <간주> 월말이면 월급 타서 로프를 사고/ 연말이면 적금 타서 낙타를 사자/ 그래 그렇게 산에 오르고/ 그래 그렇게 사막엘 가자/ 가장 멋진 내 친구야 빠뜨리지마/ 한 다스의 연필과 노트 한 권도/ 오늘도 목로주점 흙바람 벽엔/ 삼십 촉 백열등이 그네를 탄다 <목로주점>, 이연실 작사·곡, 이연실 노래, 한국음반, 1981

이 멋진 노랫말은 한 편의 시다. 군산여고를 나온 홍익대 미대생이었던 이연실이 작사·작곡했다니 그녀는 그림뿐이 아니라 시적 재능도 뛰어났음이 분명하다. 1975년 가요계의 대마초 파동에 말려 잠적했다 돌아온 그녀지만 그녀의 팬들은 여전히 고운 목소리로 ‘적금 타서 낙타를 사자’는 그녀의 권유에 미소를 지으며 풋풋한 감성에 감탄한다. 강원도 어딘가에서 초야에 묻혀 산다는 소문만 아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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