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신동 그 가난한 판자촌은 배호가 부모를 따라 중국에서 귀국해 보낸 유년의 공간이다. 채석장의 절벽은 높고 연못은 깊었다. 잠시 산 부산에서 중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상경해 외삼촌 악단의 견습으로 시작한 배호의 음악 인생, 그의 노래가 본격적으로 피어나는 청계천 언저리를 천천히 지나간다. 나는 대중가요에서 가장 완벽한 음을 구사한다는 가수 배호의 천재성을 지금도 안타까워하는 수많은 가요 팬의 한 사람이다. 미아리고개를 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배호를 따라가 본다. 거기에는 우리 가요사의 또 하나의 별 반야월 선생이 <단장의 미아리고개>로 포연 자욱했던 통한의 ‘6.25시대’를 증언하고 있다. 미아리는 영원히 우리 가슴에 아로 새겨진, 쓰라린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길목이다.
중국에서 돌아온 배호 일가의 창신동 시대
남산을 한 바퀴 돌며 배호를 추억하는 일로 전설의 가객을 마무리 짓기에는 허전했다. 그의 출생이 궁금했고, 세상을 일찍 버린 스물아홉이 애달팠다. 그를 미치도록 사랑한 사람들이 기록한 평전을 들추며 창신동을 찾는다. 도심에서 가장 가까웠던 달동네 창신동은 채석장 터의 절개 면으로 인해 아주 하늘 가까이거나 땅바닥에 붙어사는 동네였다. 터널이 생기고 땅속으로 6호선 지하철이 고려대학교 쪽으로 이어지기 전 창신동은 낙산에서 삐져나온 동망봉으로가로막힌 외딴 골짜기였다. 땅뙈기 한 평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사람들이 서울로 서울로 먹고 살기 위해 모여들던 6~70년대 이전부터 살기 어려웠던 동네였다. 배호의 아버지 배국민도 귀국열차를 타고 중국 산동성 지난(濟南)을 떠나왔다. 택시 사업을 하며 광복군 특수임무를 수행했던 아버지의 신병은 이미 깊어 배호의 유년은 병 수발과 함께 지나간다. 궁안말에 사는 소년 배신웅(배호의 본명, 아명은 배만금)은 간이 나쁜 아버지를 위해 선지피를 얻으려 주전자를 들고 숭인동 도축장으로 뛰어다녔다.
아무리 효자라도 아이들은 아이다. 골목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안양암의 바위와 창신초등학교 뒤 채석장 근처도 놀이터로 삼았다. 길 건너 숭인국민학교는 12,000명의 학생들이 3~4부제 수업을 해야 하는 아시아 최대의 콩나물시루 같은 학교였으니 위험, 안전 따위를 따질 게재가 못 되었다. 지금은 헐어버린 조선총독부(중앙청) 건물의 화강석도 모두 창신동에서 발파한 것이었다. 채석 발파는 그 후로도 이어져 배호가 공부하던 창신국민학교까지 돌이 날아오기도 했다. 채석으로 깊이 팬 곳에 물이 고여 아이들이 빠져 죽기도 했다는 연못에는 공공복지관이 들어서 있다. 배호가 다닌 창신초등학교 동문에는 트로이카 여배우 문희의 이름도 보인다. 사람이란 무릇, 입에 풀칠도 해야지만 입성도 챙겨야 하니 청계천 반경 1km 남짓한 창신동이야말로 ‘봉제 골목’이 되기에 적격이었다. 요절한 가수 김광석의 집터로 가는 길도 마도매, 걸거리, 시야게, 패턴 따위의 낯선 단어들이 유리창에 붙어 고객을 부른다. 모두 재봉틀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만 아는 용어다.
추억의 창신동을 관청은 용케도 잘 조립해 놓았다. 전설적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과 가장 한국적이라는 서양화가 박수근이 살았던 예혼은 가난했던 창신동을 위로해 주고 있다. 전태일 의 이름이 창신동 언저리에서 기념관으로 살아난 것도 옷의 생산과 유통 소비의 삼박자가 이루어지던 청계천변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여공들이 밤낮없이 돌린 미싱 소리는 옷감의 먼지와 함께 폐병으로 되돌아오기도 했다. 이제 그 여공들도 나이가 들어 온 데가 쑤시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세월이 흘렀다. 배운 게 뭐라고 아들딸 놓고도 여전히 창신동 언저리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자, 배호의 어떤 노래 한 곡을 골라 볼까. 마니아들이 특히 사랑하는 <그 이름>이 떠오른다. 배호의 가계가 보여주는 광복군의 우국충정과도 맥이 닿아 있다는 평전의 해설은 이 노래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1. 소리쳐 불렀네 이 가슴 터지도록/ 별을 보고 탄식하며 그 이름 나는 불렀네// 쓸쓸한 거리에서 외로운 타향에서/ 옛사람을 그리면서 그 이름 나는 불렀네
2. 통곡을 했었다 웃어도 보았었다/ 달을 보고 원망하며 애타게 나는 불렀네// 그 사람 떠난 거리 헤어진 사거리에서/ 옛사람을 찾으면서 그 이름 나는 불렀네 <그 이름> , 배상태 작사·곡, 배호 노래, 1969. 아세아레코드
그리고 보니 이 노래는 그저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는 노래라 하기에는 통이 크다. ‘옛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병석의 아버지와 함께 광복의 공간에서 사라져간 선구자와 선열을 그리워하는 노래로의 확장도 가능하다. ‘옛사람’ 속에는 떠나간 그녀 이상의 존경의 대상이 들어 있기에 사나이의 통곡도, 탄식도 스케일이 다르다. 경성역(서울역)에서 만주로 보낸 ‘당신’처럼. 해병대를 제대한 배상태가 동생처럼 아끼는 배호의 집안 내력을 알면서 만든 흔적이 선연한 노래다.
가난한 서울의 또 다른 상징 청계천, ‘천지 카바레’와 뮤지컬 ‘천변 카바레’
동묘 앞에는 추억의 골동거리가 북적거린다. 지하철 공짜 손님들로 역은 붐비지만 적자일 게 뻔하다. 헌책, 싸구려 옷과 잡화류가 난전을 차지하고 있다. CD와 테이프까지 이미 젊은 사람들은 더 이상 찾지 않는 물건들도 당당하게 나와 있다. 뉴트로의 바람 속에서 젊은 사람들도 구제 물건을 헤치면서 메이커의 흔적을 찾는다. 동묘 앞은 황학동 골동거리가 재개발에 밀려나 청계천을 건너온 이주단지다. 누가 마련해준 공간이 아니다. 이제 더는 갈 곳 없어진 가난했던 시절의 추억을 한 뼘씩 펼쳐 놓은 노점이다. 원래 청계천변 창신·숭인·용두·답십리는 널빤지를 잇대어 다닥다닥 집을 지은 ‘한국 현대사 최대의 판자촌 벨트’다. 국방색 군복 따위에 검정물을 들이던 염색집도, 숭인동, 마장동 도축장도 모두 염료와 핏물을 흘려보내려 청계천변에 들어선 거다. 청계천은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오탁(汚濁)을 흘려보내기 위해, 민초의 삶을 위해 몸 바친 물길이었다.
흥인문을 중심으로 한 청계천은 평화라는 이름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동평화, 청평화, 신평화 어디가 어디까지인지 이곳에서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니면 정확하게 자리를 기억하기도 쉽지 않다. 입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든 탑이 두타와 밀리오레다. 중국의 저가 물량 공세 속에서도 속도전으로 살아가는 곳이 평화시장이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동대문 전차 종점과 고양 군청이 있던 자리, 옛 덕수상업고등학교 터를 지나 ‘천지 호텔’을 찾아간다. 검색에는 ‘뉴천지호텔’이 나온다. 을지로5가 133번지다. 국립중앙의료원 맞은편 을지로 뒷골목까지 찾아가 보는 것은 배호의 흔적 때문이다. 1957년 김광빈 악단의 드럼수로 시작하여 부평 미8군 나이트클럽 ‘55YESCOM'에서 드럼를 치던 것이 17살 배호였다.
배호는 독립해서 ‘배호와 그 악단’을 결성하기 전, 1964년에 ‘천지클럽’ 카바레에서 김인배 악단에 소속되어 드럼을 치며 사회를 보았다. 이미 그의 드럼 실력과 노래의 멋은 장안에 알려지기 시작해 퇴근길에 “맥주 한잔하지”라는 말 대신 “배호 한 번 보러 갈까”라는 말이 유행했다. 4층짜리 건물은 차마 호텔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할 정도로 퇴락해 있다.
다시 청계천을 건너 종로4가 로터리에 들어서면 연지동 방향 건물 사이로 ‘두산아트홀’이 보인다. 여기에서 2010년 초연된 뮤지컬 <천변 카바레>가 떠오른다. 배호 노래를 중심으로 한 대중가요 19곡이 질펀했다. 음악평론가 강헌과 박현향 작가가 대본을 쓰고 최민철이 주연을 했다. 카바레 웨이터 춘식과 미국으로 시집가는 여가수 미미의 이야기는 1960년대 흔했던 무단 상경 청춘들의 스토리이자 코믹과 눈물이 짬뽕된 신파다. 스윙과 재즈 리듬이 겉멋을 건드리며 <두메산골>에서부터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 <커피 한잔>, <서울 야곡>, <거짓말이야> 까지 출연자의 노래는 조금은 어설프지만 ‘천변카바레’는 ‘천지카바레’의 현신임이 틀림없다.
1. 첫사랑 떠나보낸 사나이의 마음인가/ 오늘 밤엔 청계천에 비가 내리네// 비바람 몰아쳐도 두 주먹 불끈 쥐고/ 춘하추동 세월가도 말없이 걸어왔네// 아, 식어버린 찻잔 위에 내을 그려본다/ 청계천의 밤
2. 그 무엇 찾으려고 나 여기 왜 욌던가/ 붉은 등 푸른 등에 청춘을 맡겨가며// 남 몰래 가슴 아픈 서름을 달래가며/ 수레바퀴 돌아가듯 끝없는 대화 속에// 아, 이 밤도 깊어가며 내일을 기약하는 / 청계천의 밤 <청계천의 밤>, 김준규 작사·곡, 남일해 노래, 1990, 오아시스레코드
이 노래 또한 맨주먹으로 상경한 춘식의 주제가라 해도 전혀 어색할 게 없는 그 시절 풍속도와도 맞닿아 있다.